글쓰기와 말하기의 차이점, 그리고 아이디어의 중요성에 대해 다룬 글입니다. 글쓰기에서는 아이디어가 핵심이지만, 말하기에서는 청중의 반응과 전달력이 더 큰 역할을 차지합니다. 글쓴이는 말하기와 글쓰기의 본질적 차이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합니다.
2012년 3월
나는 그렇게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다. "음"이라는 말을 자주 하고, 때로는 생각이 끊기면 멈출 때도 있다. 좀 더 말을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비하면, 말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크지 않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를 갖는 것이고, 이는 좋은 글을 쓰는 데 있어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갖는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다면, 가장 단순한 말로도 이를 전달할 수 있고, 사람들은 이를 좋은 글이라고 여길 것이다. 말하기는 그 반대다. 좋은 아이디어가 좋은 연설가가 되는 데 차지하는 비중은 놀랄 만큼 작다.
몇 년 전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이 점을 깨달았다. 나보다 훨씬 말을 잘하는 연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우리 모두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내 모습은 그에 비해 어색하고 망설임이 많아 보였다. 이후 평소처럼 내 발표를 온라인에 올렸다. 그 과정에서 그 연사의 발표를 글로 옮긴다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그제야 그의 말에는 사실상 큰 내용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기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여겼겠지만, 내게는 아이디어가 말하기보다는 글쓰기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이 새로웠다.[1]
몇 년 뒤, 나보다 훨씬 말을 잘할 뿐 아니라 유명하기도 한 연사의 발표를 들었다. 정말 대단했다. 나는 그가 어떻게 하는지 배우려고 그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열 마디쯤 듣고 나서야 ‘나는 좋은 연설가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말을 잘하는 것은 단순히 아이디어가 좋은 것과 별개일 뿐 아니라,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끌려갈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발표를 할 때 대부분 미리 원고를 쓴다. 이는 실수인 줄 알면서도 그런다. 미리 쓴 발표문을 읽으면 청중과 교감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청중의 관심을 끌려면 나의 모든 주의를 청중에게 쏟아야 한다. 미리 쓴 발표문을 읽거나 암기할 때는, 주의가 항상 청중과 원고 사이에서 분산된다. 청중과 교감하고 싶다면, 개요 정도만 준비하고 문장들은 즉흥적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각 문장에 들이는 시간은 말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밖에 안 된다.[2]
즉흥적으로 말하다 보면, 라이브 청중의 자극 덕분에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글을 쓸 때처럼 충분히 아이디어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글을 쓸 때는 한 문장에 얼마든지 시간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 쓴 연설문을 충분히 연습하면 즉흥 연설과 비슷한 교감 수준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연기자들이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유창함과 아이디어에는 트레이드오프가 있다. 발표 연습을 하는 시간만큼 발표 자체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데 쓸 수 있다. 연기자들은 (대본을 직접 쓴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유혹이 없지만, 연사는 그렇지 않다. 나는 보통 발표 직전 구석에 앉아 인쇄한 원고를 들고 속으로 연습한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원고를 고치는 데 써버리고 만다. 그래서 발표할 때는 늘 군데군데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가득한 원고를 들고 선다. 이 때문에 당연히 더 자주 ‘음’이라고 하게 되고, 새로 쓴 부분을 연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3]
청중에 따라, 위에서 말한 단점보다 더 심각한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청중은 칭찬을 듣고 싶어 하고, 농담을 좋아하며, 힘찬 언변에 휩쓸리길 좋아한다. 청중의 수준이 낮을수록, 좋은 연사는 단순히 언변 좋은 말장수가 되는 경향이 커진다. 물론 글쓰기에도 이런 요소가 있지만, 발표에서는 그 경사가 훨씬 가파르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청중의 일원일 때는 독자일 때보다 더 쉽게 어리석어진다. 즉흥 연설자가 한 문장에 집중하는 시간이 말하는 시간만큼밖에 안 되는 것처럼, 발표를 듣는 청중 역시 한 문장을 듣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밖에 생각할 여유가 없다. 게다가 청중은 주변 사람의 반응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 반응은 벽 너머로 저음이 더 잘 전달되듯 대체로 더 본능적이고 저급한 쪽으로 빠지기 쉽다. 모든 청중은 잠재적 군중이고, 좋은 연사는 이를 적극 활용한다. 내가 그 유명 연사의 발표에서 그렇게 많이 웃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주변 모두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4]
그렇다면 발표는 쓸모없는가? 적어도 아이디어의 원천으로서는 글에 확실히 못 미친다. 하지만 그것이 발표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발표를 들으러 갈 때 대개 연사 자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처럼, 평소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대화하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바로 발표를 듣는 것이다.
또 발표는 동기 부여에도 효과적이다. 유명 연사들 중 상당수가 ‘동기 부여 연설가’로 불리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마 대중 연설의 본령은 동기 부여에 있을지 모른다. 원래도 그랬을 것이다. 발표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감정적 반응은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이 힘이 늘 좋은 데 쓰이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주석
[1] 여기서 말하는 발표는 학술 연설이 아니다. 학술 연설은 성격이 다르다. 그 자리의 청중들은 농담도 좋아하겠지만, (그래야 하며) 당신이 내놓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의 깊게 보려 노력할 것이다.
[2] 이것은 하한에 가깝다. 실제로는 더 나을 수 있다. 발표 주제는 대개 이미 써본 또는 이야기해본 것들이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말하더라도 예전에 썼던 문장들이 자연히 나오는 경우가 많다. 초기 중세 건축처럼, 즉흥 발표는 예전의 흔적(spolia)들로 이뤄진다. 이 점은 개인적으로 살짝 부정직하게 느껴진다. 마치 지금 막 생각난 척하며 그 문장들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3] 로버트 모리스가 한 가지 덧붙여 줬다. 발표를 연습하면 발표가 더 좋아지는 점이 있다. 발표문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어색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나도 동의하며, 그래서 내가 쓴 글은 거의 모두 최소 한 번은 소리 내어 읽어본다.
[4] 청중이 충분히 적은 경우, 청중이 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더 어리석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청중이 어느 정도 이상 커지면서부터, 그때부터 대화처럼 느껴지지 않고 순수한 ‘군중’이 될 때 나타난다. 대략 10명쯤부터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
감사: Sam Altman과 Robert Morris가 이 글의 초고를 읽고 피드백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