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막간에서는 지옥의 무서운 현실을 담은 '방송' 비디오를 본 경험을 통해 신정론과 악의 문제를 탐구한다.
악마가 꾸민 가장 위대한 속임수는,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 최대의 속임수라는 그 말보다 더 큰 속임수는 없다고 믿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 스티븐 카스(Steven Kaas)
[콘텐츠 경고: 이 장의 II부에는 지옥, 고어, 강간, 심리적 고문, 죽음 등이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일부 독자는 경고에서 예고된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충격을 받았다고 하오니 주의 바랍니다. 만약 원하지 않으시면 II부를 건너뛰고 바로 III부를 읽어도 스토리를 크게 놓치지 않습니다. 지옥 자문을 맡아준 Pyth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나와 함께 산 지 석 달, 나는 한 번도 방송을 본 적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늘 그랬듯이 신정론에 관해 이야기 중이었다. 아나는 카이니파(Cainites)가 어떻게 성서의 도덕률을 ‘먼치킨’식으로 악용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먼치킨짓이란 롤플레잉 게임에서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보단 규칙 속의 작고 이상한 허점을 찾아내서, 게임의 본래 취지를 훼손하며 지나치게 쉬운 길만 노리는 행동을 뜻한다. 성서에서는, 누가복음 15장 6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회개한 죄인 한 명에 대해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고 되어 있다. 하늘의 기쁨이 극대화되도록 한다면, 가장 쉬운 먼치킨식 해법은 일부러 죄를 잔뜩 짓다가 나중에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크기와 회개로 인한 하늘의 기쁨 사이의 관계’에 상식적인 가정을 추가해보면... 결론이 딱히 어렵지 않다.
아나는 카이니파를 비판했다. 나는 잠정적으로 그들을 옹호했다.
“너무 법의 문자만 따르면서 취지는 무시하면 안 돼!” 아나가 항의했다.
“와 네가 _카발리스트_라는 사람이 문자 해석에 반대한다고? 문자 따위 관둬? 우리 신앙의 핵심이, 심지어 성서 글자의 아주 작은 점, 붓획 하나마저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거잖아! 하나님이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말라고 하셨더니 랍비들은 전기를 쓰는 것도 포함된다고 해석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엘리베이터가 자동으로 매 층마다 멈추도록 프로그래밍해서 굳이 버튼 누르지 않아도 탑승만 하면 전기 사용에 ‘직접 개입하지 않음’이 되어 문제없게 만들었어. 카발라의 모든 _의미_는 ‘하나님이 특정 해석이 가능하도록 문구를 넣은 거라면, 반드시 그 의미를 의도하셨다’는 주장이지. 그런데 ‘회개가 의로움보다 더 낫다’는 것뿐 아니라 수치까지 제시한 이런 분명한 문장이 그냥 실수였다는 거야?”
“너 지금 말하는 건 유대인의 성서고, 기독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안 해석해. 그리고 하나님도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해석 안 할 걸 아셨으니 그런 복잡한 복선은 넣지 않으셨을 거라고.”
“하나님은 복잡한 복선이 인생 그 자체셨단 말이야. 갈릴레이가 뭐라고 했더라? 우리에게 이기적인 해석을 하도록 지성이란 무기를 주신 동일한 분께서, 정작 쓸 때가 되니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나는 믿지 못하겠네.”
아나는 장난스럽게 내 얼굴을 찰싹 때렸다.
“왜 때려?”
“동일한 신이 내게 때릴 손도 주셨으니 사용하지 말라고 하시진 않았겠지!”
“조심해” 나는 소파에서 큰 베개를 집었다. “신께서 내게 베개도 주셨거든.”
“설마...”
나는 그녀를 향해 세게 베개를 휘둘렀다. 책 더미와 화분이 가득한 탁자 옆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베개가 그녀 얼굴에 명중했다. “보이지? 나 지금 공식적으로 방금 일에 대해 회개하겠다고 선언할게. 그러니 하늘은 지금 너보다 나를 더 기뻐해.”
“진지하게, 정말...”이라고 아나가 했는데 이번엔 정말 진지했다. “왜 하나님이 굳이 우리를 죄가 많아지도록 유도하는 구절을 넣었을까? 누가 이 구절을 ‘살인 저질러도 어차피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고 오해하면?”
“잘 모르겠어. 하지만 ‘뱀’이랑 ‘메시아’가 게마트리아 값이 같다는 거, 그리고 옛날부터 카발리스트들이 ‘악이 구원의 열쇠’라고 말해왔다는 것, 그리고 전능한 신이 악으로 가득한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 이건 확실하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그녀 말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봐봐. 하나님은 분명히 어떤 수준에서는 악의 존재를 원하셨다는 결론이 나와. 아니면 왜 사탄(타미엘)을 굳이 창조해서 우주에 풀어놓으셨겠어? 그러면, 심각하게 결함 있는 사람들이 악행의 변명거리로 쓸 만한 구절도 성서에 넣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지.”
“회개 신정론에 가까워지고 있어.” 아나가 말했다. “하나님이 우주에 악을 두신 이유가, 회개가 너무나 대단한 가치라서라고 하는 이론. 하지만 난 잘 모르겠어. 회개가 위대한 건, 악의 존재를 멈추게 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계속 성인군자처럼 사는 것보다 회개를 더 축하하는 건, 다른 악인들에게 ‘네가 그만두기만 하면 환영하고 축하해줄 거야’라는 큰 신호를 주고 싶어서야. 누군가 날 때리고 미안하다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말하는 게, 계속 때릴 생각이거나 아예 날 안 때리는 것보다 낫긴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안 맞는 게 제일 낫지.”
“글쎄,” 내가 말했다. “신이 그냥 회개란 행위를 그 자체로 좋아하는 걸지도. 그동안 하신 일 중 대체로 이상한 것들 많잖아. 플라티푸스를 만들었다고.”
“이래서 나는 신정론 얘기가 싫어!” 아나가 말했다. “다들 결국 ‘아, 하나님이 원래 좀 이상하다’로 끝내려고 하잖아. 물론이겠지! 하지만 어떤 방식으론 그 이상함 자체도 이해 가능해야 해. 궁극적으로 통찰 가능하고 패턴이 있어야 해. 내가 정말 믿을 수 없는 건, 우리한테 이성을 준 신이 이제 와서 쓰지 말라고 한다는 거야.”
“우주는 엿 같아,” 내가 말했다. “받아들여.”
“문제의 핵심이 그거잖아! 우리가 우주가 조금만 엿 같으면 받아들일 수 있겠지. 하지만 아무도 이 우주가 유발하는 이 모든 끔찍함을 감당하지 못해. 자기한테 닥치면 더더욱. 직접 목격해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나마 견디는 이유는, 그저 아예 생각조차 안 하고, 시야 맨 끝 어딘가에 두고 웬만하면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야. 누군가 지옥이 있다는 걸 다 알았지만 ‘방송’을 보기 전까진 아무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처럼.”
“나야 뭐, 할 말 없지. 방송 자체를 본 적이 없어.”
아나는 깜짝 놀랐다. “진짜? 왜?”
첫 번째 이유는, 그게 텔레비전 방송이었는데 이제 TV란 게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980년대 중반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TV 방송은 기술·물리 법칙의 기괴하고 불규칙한 붕괴로 인해 멈췄다. 인터넷은 아직도 작동하지만, 아무도 못 풀 미스터리로 인해 비디오나 오디오는 전송되지 않는다. 비디오·오디오는 프로그래머들이 별것 아니라는 듯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 유일하게 꾸준히 돌아가는 영상기술은 구식 필름과 VHS 테이프뿐이었다. 일부에선 타미엘이 방송용 VHS만은 일부러 남겨둬서 누군가 영화관에서 틀게 하지 못하게 한 거라고 소문냈지만, TV 없이 무용지물이었다. 방송을 보고 싶으면, TV 있는 사람을 수소문하고, VCR도 구하고, 방송 녹화본 테이프도 찾아야 했다. 이건 불법이거나, 아니면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방송은 원래의 미국을 붕괴시키고 많은 이들을 미치게 했으며, 그 내용이 결코 자살이란 결과를 유도할 리 없는데도 몇몇은 죽음을 택하게 만들었다. 나는 금단의 미스터리를 탐구하는 걸 즐기는 편이지만, 방송만큼은 ‘매혹도:전율도’의 비율이 너무 잘못 잡힌 물건이었다.
“으, 그냥... 아직 기회가 없었나 봐.”
“나 지하실에 TV랑 VCR 있어! 지금 보자!”
“...왜 그게 지하실에 있어?”
“나도 방송 보고 싶어서 그랬지! 신정론 몇 년씩 공부하거나 하면서도 방송은 안 봤을 거라고 생각했어? 벼룩시장, 야적장 다 돌아다니면서 장비 다 구하고 테이프는 조화옥용제국(중국)에다 주문했어. 제대로 돈만 주면 뭐든지 구할 수 있는 나라인데 이 방송은 역사 그 자체거든. 진짜 ‘서사시’를 이루는 사건이야.”
“흠...”
“진짜라니까. 전에 영어 선생님이 서사시를 정의할 때 엄청 복잡하게 얘기한 적 있어. 반드시 ‘인 메디어스 레스(in medias res)’로 시작해야 하고, 여러 나라를 무대로 해야 하고, 사물의 장황한 목록도 들어가고, 말하는 배도 나와야 하고, 신의 개입도 꼭 있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지옥으로의 여행’이 포함돼야 한대.”
“말하는 배?”
“아르고호 이야기, 아마 그런 거였던 것 같아. 내 선생님은 반드시 필수라고 했지만, 사실 옵션이겠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봐. 미국의 역사는 이미 ‘중간 중간의 이야기’로 시작해— 1776년 전부터 여긴 문화가 있었잖아. 나라 다섯 곳— 미국, 캐나다, 멕시코, 쿠바, 필리핀, 프랑스, 독일, 일본 등등. 센서스(인구조사)처럼 장황한 목록도 있어. 신의 개입이야 셀 수 없이 많고. 그리고 이제 방송도 등장했지. 지옥으로의 여행. 이제 진짜야. 미국 전체가 서사시 안에 있어.”
“아직도 말하는 배는 없어.”
“말하는 배는 옵션이라고! 방송 볼 거야, 말 거야?”
다니엘 산토니는 히말라야 탐사 도중 비극적으로 사망 전까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사랑받던 진행자였다. 그는 직장 내 성추행으로 악명 높은 바람둥이기도 했다. 그의 사망에 대해 수백만 팬들은 애도했지만, 가까운 이들은 조용히 안도했다.
지금 그는 사람 키 두 배는 되는, 검은색으로 완전히 변색되어버린 금속으로 된 문짝 앞에 서 있다. 이 문짝은 거대한 직사각형 틀 안에 놓여 있었고, 틀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를 평평한 돌 표면에 설치되어 있다. 땅인지, 천장인지, 벽인지 불분명했고 산토니는 아무데도 ‘서’ 있는 느낌이 없었다. 문과 문틀에는 뒤엉킨 남녀의 괴기하게 찌그러진, 악몽처럼 녹아내리는 표정의 조각상이 숱하게 들어가 있었다. 수백 명이 수백 년을 매달려야 나올 정도의 정교함이었다. 고딕체로 ‘이곳에 들어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ABANDON ALL HOPE, YE WHO ENTER HERE)’고 적혀 있었고, 그 위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환영합니다.” 산토니가 시청자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억눌린 듯했으며, 방송을 본 사람 중 ‘산토니가 진심으로 이 일에 동의해서 하는 듯하다’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멍이나 상처 하나 없어 보이지만 얼굴은 완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저와 제... 예전 팀원들은 오늘... 아주 특별한 내셔널지오그래픽, ‘지옥 편’을 보여드리러 왔습니다.”
배경음엔 내가 대통령과 타미엘의 면담 녹음에서 한 번 들었던 그 ‘반(反)음악’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자막이라도 나오면 소리를 꺼버릴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이 문에 적힌 문구를 악마가 겁을 주려고 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쪽은 지옥 바깥, 악마의 힘이 조금 약한 쪽이죠. 이 경고는 친절한 누군가가 사람들을 위해 남긴 조언입니다.”
지옥의 문이 열리고, 산토니와 그의 팀이 안으로 들어섰다. 카메라는 회전했다. 문의 안쪽에는 ‘계속 희망을 가져라, 이 바보들아(KEEP HOPING, SUCKERS)’라고 적혀 있었다.
“절망에도 나름대로의 마비 기능이 있습니다.” 산토니가, 그 자신이 경험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옥의 악마들에겐 희망을 집요하게 죽이지 않는 게 심리적 고문의 핵심입니다— 육체적 고문만큼 중요하죠. 더 자세한 내용은 4지옥 대공, 가아셰켈라(Ga’ashekelah)와 함께 들어봅니다.”
화면이 일종의 석실 사무실로 옮겨갔다. 가구는 처참하게 뒤틀려 만들어진 인간들의 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아셰켈라는 표정 가득한 팬서의 머리를 얹은 거인처럼 보였으나, 머리 전체가 속삭이고 짖는 입만으로 되어 있었다. 화면 하단에는 그의 직책이 ‘고문 전문가’라고 떴다. 그는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두 명의 인간으로 이루어진 의자에 앉았고, 그가 몸을 내릴 때 두 사람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지옥에 있는 죄인은 몇 년마다 한 번씩 탈출 기회를 ‘준비’해둡니다.” 악마가 산토니에게 설명했다. “한 세기 동안, 피부를 한 겹씩 천 번 벗겨내고는 다시 붙이면 또 그걸 반복하고, 모든 구멍으로 강간당하고, 심지어 아직 생기지 않은 구멍으로도 당하고, 수십 년 동안 손발톱을 뽑았다 재생시키기를 반복하고... 그런 다음, 어느 날 갑자기 악마가 다가와서는, 기록에 실수가 있어서 당신은 사실 천국에 가야 한다고 말하죠. 실수였다고, 미안하다고, 몸을 깨끗이 씻긴 다음, 고위 악마들이 도대체 고문받던 죄인을 호위해서 문 앞으로 데려가줍니다. 당신은 눈물 범벅으로 신을 찬양하며 고마워하다가, 갑자기 우리는 모두 배꼽을 잡으며 웃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손톱 담당 고문관에게로 다시 끌려가거든요.”
가아셰켈라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란 게 참, 학습을 안 하더군요. 한 세기 후, 완전히 똑같이 말만 ‘이젠 진짜라고 하네’ 정도만 더해주고 똑같이 반복해도, 당신은 반드시 믿습니다. 대안은 ‘내가 영원히 갇혀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뿐이니까요. 그리고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지요. 만약 이 패턴이 통하지 않으면 좀 더 창의적인 방식을 씁니다. 같이 고생한다는 동료가 ‘죽을 수 있는 비밀 이름’을 알았다며, 다른 사람 다섯 명에게 시켜보고 그들이 쓰러지는 걸 확인시켜줍니다. 당장 희망이 생긴 당신은 그 이름을 외치고... 모두 모여 한바탕 웃습니다. 동료는 악마 편이었고, 이름은 헛소리거나 하나님을 욕하는 언어였죠. 더 창의적으로 할 수 있지만, 내 모든 비밀을 밝힐 수는 없으니까요. 왜 내가 이것까지 말하냐고요? 아무 상관 없으니까. 인간, 충분한 고통을 겪으면, 잠깐의 안도라도 약속하는 일엔 뭐든 믿게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주면, 뭐든지 믿어요. 네, 문 안쪽엔 ‘계속 희망을 가져라, 이 바보들아’라고 적혀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래야 하니까.”
산토니의 내레이션은 중립적 영국 억양이었지만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는 타미엘이 사탄의 죽음에서 나온 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수많은 악마 중 하나, 가아셰켈라가 지옥의 심리적 고문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고문은...”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몸을 떨며 혼잣말을 시작했다. 화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가 다시 바뀌었고, 이번에는 철제 새장으로 가득찬 평원에 있었다. 새장들은 군집을 이루어 유기체처럼 뻗어 있었다. 각 새장은 사람들로 꽉 차 움직일 공간이 전혀 없었고, 겨우 바깥쪽에 있는 사람만이 손발을 밖에 내밀 수 있었다.
“지옥의 대부분은 이렇습니다.” 산토니가 말했다. 이번엔 그의 얼굴에 멍이 선명했다. “이 감옥 안의 사람들은... 지금 이 각도에선 볼 수 없겠지만, 온도가 천 도를 넘습니다. 철창은 녹은 듯 뜨겁죠. 이 사람들의 몸은 타지 않지만, 여전히 고통은 산 사람만큼, 아니 더 심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굶지 않아도 배고픔에 시달리고, 물이 필요 없는데도 갈증에 시달리고...” 그는 스스로 말을 끊었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 이들은 정신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적응도 안 되고... 천일째도 첫날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제발, 여기까지만 하게 해 주세요... 제발...” 화면 너머 무슨 신호가 있었는지 그는 멈칫했다. “이제 이 감옥의 사람 몇 분을 인터뷰해 보겠습니다...”
산토니는 마이크를 감옥 가장자리로 내밀었다. 한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구————————————제———줘——!” 비명이 너무 커서 나조차 움찔했다. 곧 감옥 전체에서 울부짖음이 터졌다. 그중 겨우 하나 둘:
“나는 미니애폴리스 오벌 스트리트 242번지 메이벨 릭스, 내 이름 기억하는 사람 아무나 제발, 무슨 수든, 뭐든 하세요, 오 신이시여...”
“닥쳐라!” 딱 붙어 뼈가 부러질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비좁게 밀착한 남자가 소리쳤다. “닥쳐 이년아. 마이크 내놔라. 나야...”
짧은 몸싸움이 잇고, 화면은 불타는 해골에 고정됐다. 해골에는 ‘감치코스(Gamchicoth), 고문 전문’이라고 떴다. “우린 감옥 동료 배치에도 신경을 써요. 전 인류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장 상극이 될 사람들을 일부러 모아 배치합니다.”
난 아나를 돌아봤다. “별로 더 보고 싶지 않아.”
“꼭 봐야 해.” 그녀의 대답은 평소답지 않게 너무나 단호했다.
“뭐? 꼭 그럴 필요 없어!”
“네가 악의 문제를 너무 쉽게 넘기려 했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냥 ‘하나님이 좀 별나다’ 하면서, 이런—” (TV 화면을 가리키며) “플라티푸스 만든 거랑 같은 급으로 취급하려고 했잖아! 신정론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보기나 해!”
나는 겨우겨우 눈을 다시 TV로 돌렸다. 산토니는 어둠 속 검은 악마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름은 ‘타기리온(Thagirion), 고문 전문’이었다. 지옥엔 고문 전문가가 참 많았다. 또 다른 삭막한 평원, 이번에는 검은 색조의 건물들이 들쑥날쑥 놓여 있었다. 철 나무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고, 차량들은 찢기고 피터진 노예들에게 끌려왔다 갔다 하며 음식을 옮겼다. 도로 옆에는 잘린 머리가 창에 꽂혀 있었고, 일부는 바람이 아닌데도 움찔움찔 움직였다.
“일부 악마들은 이곳을 ‘유황농장(Brimstone Acres)’이라고 부릅니다.” 타기리온이 말했다. “여기는 지옥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좋은 곳, 물론 상대적이지요. 가장 나쁜 죄인들을 위한 곳입니다. 히틀러도 별장이 하나 있고, 베리아, 라롤리 등도 있죠. 유인 설계 이론의 기본입니다. 최악의 죄인이 최악의 처벌만 받는다면, 자신이 지옥에 갈 거라 직감하는 죄인도 좀 더 나쁜 짓은 삼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를 유도하죠. 이미 지옥행이 확정됐다면, 최대한 최악이 되어 이 명예로운 별장에 오르도록 유혹해야 하는 겁니다. 여긴 그 시작입니다. 스탈린 시대 러시아에서 죽은 나쁜 놈들이 있는데, 전 그들 모두가 베리아가 잘 사는 걸 실시간으로 알게 할 때 참 재미있거든요. 음식, 술, 그리고 원하면 뭐든 부릴 수 있는 노예들. 당연히 이 노예들은 전부 베리아를 가장 증오하던 사람들이죠. 이 자체가 최고의 고통입니다. 효율적으로 악을 극대화하죠. 홀로코스트 피해자에겐 마법석을 줘서 히틀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게 해주고, 정말 살벌한 비명을 듣게 됩니다.”
나는 거의 베개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다시피 했다. 방송 대부분을 못 봤거나, 아니면 기억에서 아예 지웠던 것 같다. 언젠가는 아나가 내게 물을 떠다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한 기억이 없다. 그녀가 내 곁에서 떠나라는 허락을 하지 않은 한 일어나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앉아서 좀비처럼 소리와 화면을 그냥 흘려보내기만 했다. 얼마나 오래인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기억난다. 이번에도 새장으로 가득한 평원이었지만, 전보다 조금 더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개인 단위의 철 새장에서는 각자 악마 한 명이 죄인 한 명을 ‘개별 관리’하고 있었다. 절규와 울음소리가 너무 강해서 무슨 말인지조차 구분이 안 됐다. 시각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구별해서 보면 아이들만 든 새장도 있었다. 커다란 뿔달린 악마—다큐는 그를 ‘골라캅(Golachab), 생명윤리학자’라 불렀다—는 우리마다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눈알을 뽑았다. 눈은 금세 다시 자랐고, 땅에는 뭉텅이로 뽑힌 안구가 수북했다.
“여기 네 엄마도 데려왔다.” 골라캅이 말했다.
“엄마를 천 년 동안 고문할게요!” 아이가 울부짖었다. “2천 년! 악마님이 보여준 거, 거미로 하는 그거! 새로운 고문 방식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제발!”
“희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멍청이들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골라캅이 산토니와 카메라 향해 말한다, “탈출 결과 1% 가능성만 보이면, 드물게 덜 붐비는 새장, 좀 더 쉬운 고문, 아니면 최악의 악마 턴만 빼주는 조건 등 뭐든 내걸어요. 스토아 철학의 인내? 그런 건 없습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덕성을 빼앗는 법? 당사자에게 스스로 자기 원칙을 헐값에 팔도록 유인하는 거죠. 저기 어린애 저 친구, 지옥 오기 전엔 어떤 고난도 가족을 해치게 만들 순 없다고 굳게 믿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오히려 자청해서 엄마를 2천 년 고문하게 해달라고 빌죠. 우린 물론 거절하고, 걔는 비명을 지르고, 수십 년 후 다시 찾아왔을 때 걘 이전보다 훨씬 더 괴이한 방식으로 엄마를 희생하겠다고 애원할 겁니다. 또 거절하죠. 그리고 그가 이미 겪던 모든 고문은 그대로 거기에, 평생 믿은 원칙까지 스스로 헐값에 팔고도 아무 이득 못 봤다는 사실만 추가해줄 뿐이죠. 또는 제안을 받아주고 진짜 2천 년 동안 엄마를 고문하게 할 수도 있지요. 대신에 단 한 번의 특전도 주지 않아, 배신해도 소용 없다를 뼛속까지 새기게 하는 겁니다.”
이때 내 눈은 다른 장면에 끌렸다. 구석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녹슨 철의자였고, 그녀는 똑바로 앞을 보며 입을 다물고 꼼짝하지 않았다. 온몸에서 절대적인 공포가 뿜어져 나왔다. 작은 초록 악마가 작은 붓으로 그녀 피부를 밝고 아름다운 하늘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신체적으로 직접적 고문이라기엔 제일 덜해 보였지만, 그 표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아마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른 고문을 다 볼 수 있어서였을지도.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엄청난 고통을 줬을지도. 산토니가 이 장면을 보다가 카메라를 떨어트렸다. 화면은 검은색으로 잠시 떴다가, 누군가 카메라를 다시 들어 올리고 뿔달린 악마에게 겨냥했다.
타미엘이 갑자기 등장했다. 그는 뿔달린 악마 곁으로 걸어와 말했다. “나도 도울게.” 그리고 한 번에 두 갈래로 갈라진 창(bident)으로 아이의 두 눈을 동시에 찔렀다. 창을 쑥 뽑아두자 두 눈알이 튀어나왔고, 이걸 카메라 앞에 바싹 들이댔다. 어떤 공포도 그 눈에서 보던 절망만큼 처참하진 않았다. 잠시 후 카메라는 다시 타미엘의 끔찍한 두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타미엘이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언젠가 여러분 대부분은 우리에 대해 더 잘 알 시간이 영원토록 생기니까요. 그게 10%일지 90%일지는 안 알려줘요. 여러분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거든. 자격 조건, 불교든 기독교든 무신론이든 아무도 안 알려줘요. 여러분이 모든 걸 두려워하게 하고 싶거든요. 여러분의 꿈까지도 사로잡고, 죽은 뒤 한 번도 먹을 수 없고 목말라 죽을 수도 없는 그런 세계에 갇히지 않을지 두렵게 할 겁니다. 영원히 뜨거운 감옥에 갖혀, 벗겨지고, 해체되고, 강간당하고, 눈을 파내고 계속해서 기름을 붓는 고통을 끝도 없이 반복하겠죠.
‘지옥은 신이 없는 곳’이라든지, ‘이 땅에서의 고통’이라든지, 다 바람에 불과합니다. 지옥은 진짜 땅속 불과 악마가 가득 찬 곳이에요. 그 이름대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차피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죠. 며칠, 혹은 며칠동안 여러분은 충격을 받고 변화하려 애쓰겠죠. ‘이젠 다시는 안 그럴 거야’라고 결심하다, 서서히 기억은 흐려지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모두 원상태로 돌아갈 겁니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어요. 여러분이 그만큼 강하지 않아요. 여러분의 본질은, 내가 칼빈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현실이죠— 변명을 하고 계속 살게 되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영원히 살진 않잖아요. 그리고 여러분이 죽으면, 내가 여기서 기다릴 겁니다.”
타미엘은 창을 카메라에 겨누며 찔렀다. 렌즈 끝이 뚫리자, 형언할 수 없는 공포, 논리적으로 딱히 더 끔찍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더 본질적인 공포감이 화면을 장악한 뒤, 블랙아웃.
“자,” 아나가 말했다. “이게 방송이야. 어땠어?”
나는 소파에 토해버렸다.
방송은 1972년 백악관 우편함에 낯선 갈색 봉투로 도착했다는 소문이었다. 전국적으로 매우 긴장된 시기였다. 닉슨은 재선을 노렸고, 타미엘과의 동맹은 외교적 성과였지만, 의회와 거리 시위대에서 계속 신학적, 실질적 위험을 논의했다. 소련은 수차례 패배를 선언당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에 가까워보였다. 타미엘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다음은 어디일까? 도와준 적이 미래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미국 대중은 불안했고, 닉슨의 적수 조지 맥거번(이름도 카발적으로 중요한)은 전국을 누비며 발언했다.
참고로,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의 진영은 ‘대통령 재선 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 즉 CREEP라는 약칭까지 썼다. 닉슨은 정치엔 천재였지만, 인간성이 조금 부족했다. 방송을 본 그는 협박이려니 여겼다. 타미엘이 대본을 어기면 방송을 공개해 닉슨을 괴물처럼 보이게 할지 몰라, 불을 키우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닉슨은 ABC, NBC, CNN 등 대형 방송사에 만약 방송을 받게 되면 절대 방영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명백한 수정헌법 1조 위반이었지만, 닉슨의 헌법 사랑은 카이니파의 성서 해석과 비슷했다. 방송국들은 지시를 따랐다. 그리고 닉슨과 CREEP는 무사히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실제로 방송국에는 아무런 ‘방송’ 테이프가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타미엘이 1973년 모스크바를 완전히 박살냈다. 바빌론/대국이 무너졌다.
서유럽엔 불안이 감돌았다. 미국-지옥 동맹도 금이 갔다. 중국(조화옥용제국)은 양쪽 모두 기웃거렸다. 모두 숨을 죽였다.
닉슨도 강수에 나섰다. 타미엘에게 “방송”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타미엘은 미동도 없었다. 그래서 닉슨은 이것을 방송국에 넘겼다. '재선은 이미 했으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닉슨스러운 논리였다.
결국 1973년 11월 1일, 방송 영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에게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