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 카발라, 역사와 언어의 숨겨진 구조를 통해 ‘세계의 코드’를 탐구하는 에세이 형식의 장면으로, 우주와 인간사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패턴을 다룬다.

게시 날짜: 2016년 1월 13일 · 글쓴이: 스콧 알렉산더(Scott Alexander)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적용하시는 모든 종류의 데이터에 대하여 일하시리라.
— kingjamesprogramming.tumblr.com
**“세계의 코드(The Code Of The World)” – 아론 스미스‑텔러(Aaron Smith‑Teller) 지음
스티븐사이트 스탠더드(Stevensite Standard) 2017년 3월호 게재**
탈무드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974세대 전에 토라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의 세대인지는 나도 모른다. 탈무드는 좀 미친 책이다.
그런데 토라는, 기본적으로는 창조와 먼 과거에 대한 짧은 이야기 몇 개 다음에 모세에 대한 길고 복잡한 전기가 붙어 있는 책이다. 하느님은 왜 이스라엘인 한 사람의 인생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셔서, 그 사람이 살게 될 우주에 첫날이 떠오르기도 전에 그의 이야기를 애정 어린 필치로 그려 두셨을까?
탈무드에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모세가 시나이 산으로 토라를 받으러 올라가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하느님이 셀 수 없는 억겁 동안 얼마나 공들여 토라를 쓰셨는지를 설명하자, 천사들이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 모세라는 놈에게 그걸 주십니까? 얘가 누굽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집어온 필멸의 잡놈이잖아요! 우리는 천사입니다! 우리에게 주셔야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은 죄가 많기 때문에 더더욱 토라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천사들은 그 말에 승복한다.
그런데 이 논쟁은, 실제로 하는 말보다 하지 않는 말 때문에 더 흥미롭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 잠깐만요, 당신들 토라를 읽기나 해 보셨어요? 다섯 권 중 네 권은 완전히 저, 개인에 관한 이야기예요. 심지어 토라 안에 ‘하느님이 내게 토라를 주시는 장면’까지 있거든요. 어떻게 제 전기를 제 손에서 빼앗을 권리가 있다고 우기시는 겁니까?”
랍비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토라’를 둘로 나눈다. 역사적 토라, 즉 모세의 삶의 기록과, 법적 토라, 즉 의례 규범이다. 하느님은 법적 토라를 미리 써 두셨다. 천사들이 원했던 것은 그 법적 토라였다. 하지만 이 설명도 그다지 잘 들어맞지는 않는다. 법적 토라를 보면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 어느 정도까지 가까운 친족과는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되는지 같은 온갖 규정이 나온다. 이런 건 세상을 만들기 974세대 전에 다 완성해 둘 필요가 꼭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이런 건 천사들이 신경 쓸 일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답을 제시하기 전에, 얼핏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몇몇 분야들을 훑어 보자.
우주의 역사는 아득히 먼 과거에 시작되지만, 빅뱅 직후 우주가 충분히 식으면서 질량이 나타나고, 물리법칙 속의 대칭이 깨지는 시점부터 본격적인 국면에 들어선다.
자연사는 아득히 먼 과거에 시작되지만, 수십억 년 전 유사분열(유사분열, mitosis) 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는다. 세포 분열을 가능하게 하는 복제 과정 덕분에 이후의 모든 생명체가 번식하고 진화할 수 있었다. 유사분열은 DNA라는 ‘유전 암호(genetic code)’를 복제하고 보존하는데, 이 암호는 동물의 표현형을 결정한다.
인류의 역사는 아득히 먼 과거에 시작되지만, 역사상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인(Mesopotamians) 의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들은 곧이어 함무라비 법전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데, 이후 등장하는 모든 법전과 국가, 정부의 선조다.
미국의 역사는 아득히 먼 과거에 시작되지만,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에서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된 이후 본격적인 국면으로 접어든다. 곧이어 미국인들은 헌법, 곧 이 땅의 법을 비준한다.
이렇게 서로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여러 종류의 역사들은 모두 아득히 먼 과거에 시작되지만, M‑S‑S라는 글자들이 그 순서로 등장하는 급격한 상전이(phase change)를 겪고, 곧이어 법전이 제정된다.
그렇다면 성경이 세계의 창조로 시작하지만, 곧이어 모세(Moses) 라는 이름의 인물이 등장하고, 시나이 산에서 율법이 수여되는 장면을 전환점으로 맞이한다는 사실을 보면, 이것을 단지 한 사람의 개인사로만 읽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¹
게브론과 엘르아자르는 카발라를 “상징의 패턴을 통해 드러나는, 숨겨진 통일성”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정의는 지금 논의에도 잘 들어맞는다. 자연사, 인류사, 미국사, 성서사의 구조들 사이에는 숨은 통일성이 있다. 각각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MSS라는 상징이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법이 부과된다. 이것을 우연이라 치부하는 사람은, 곧 이 우연들이 터무니없이 많이 쌓인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카발라적 관점에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가 프랙탈이라고 믿는다. 우주 전체는 ‘아담 카드몬(Adam Kadmon)’이라는 하나의 일반적인 형상을 가지며, 그보다 작은 모든 부분들 — 비잔티움 제국에서 여성 생식기에 이르기까지 — 은 그 전체의 작고 자기 유사적인 사본이다. 때때로 그 사본들은 심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마치 서로 다른 화가들이 같은 주제를 제각각 그려 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결국은 사본이다.
예를 들어 “중국사의 경우는 이 패턴에 안 맞지 않는가?”라는 반론을 생각해 보자. 중국사도 물론 시작에는 시작이 있고, 어느 시점에서 법을 주는 성인의 등장과 함께 보다 문명적인 단계로 전환된다. 하지만 그 성인의 이름은 공자(Confucius)이지, 이름 어딘가에 M‑S‑S라는 음가의 조합이 들어 있지 않는다. 구조가 실패했다는 징조일까? 그렇지 않다. 공자는 가르침을 전했지만, 그것이 널리 퍼져 중요성을 획득한 것은 그의 후계자 맹자(Mencius) 가 그것을 기록하고 해석한 이후다. 여기서는 내러티브(서사)와 음운론적(발음) 측면이 둘로 쪼개져 서로 밀접히 연관된 두 사람에게 나뉘어 있는 것이다.²
다른 경우에는, 성경 속의 두 인물이 한 인물로 합쳐지기도 한다. 모세와 아담을 보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로 이끌며, 홍해를 건너 이집트 군대를 멸망시키고, 계명을 받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첫 지도자가 된다. 아담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하신 계명을 어기는 인물이다.
그런데 미국 역사에서는 이 두 측면이 조지 워싱턴이라는 한 사람에게 합쳐져 있다. 자유를 향해 미국인들을 이끈 사람, 델라웨어 강을 건너 영국군을 격파한 사람, 헌법을 손에 넣은 사람, 그리고 미국인들의 첫 지도자가 된 사람은 워싱턴이다. 동시에, 아버지가 “그 나무는 베지 말라”고 한 것을 어긴 사람 역시 워싱턴이다. 더 나아가 아담과 워싱턴의 이야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아담은 책임을 피하려 한다. (“나에게 먹으라고 한 것은 여인이었습니다.”) 반면 워싱턴은 겸손하게 책임을 인정한다. (“아버지,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체리 나무를 베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타락한 상태에서 태어나지만, 미국은 순수한 상태, 곧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shining city on a hill)”로 태어난다.³
여기서도 공자 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의미론적(semantic) 측면과 음운론적(phonetic) 측면의 분리가 보인다. 워싱턴의 후임 대통령의 이름은 ‘애덤스(Adams)’였고, 그의 출신지는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였다. 성경 속 아담은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옆에서 창조되었고, 존 애덤스는 브레인트리(Braintre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른 대응 관계들은 훨씬 더 멀리 흩어져 있다. 모세의 아내 이름은 ‘치포라(Zipporah)’인데, 히브리어로 “암새(female bird)”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미국 역사 속 대응 인물은 린든 B. 존슨(LBJ)까지 가야 나온다. 미국이 덤불(bush)의 목소리를 듣고, 출구 전략 없이 사막을 헤매게 된 것은 세기가 바뀐 무렵이 되어서였다.
이처럼 얼마나 비틀고 늘어뜨리든, 그 밑에 깔린 통일성은 언제나 자신을 드러낼 길을 찾아낸다.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간 몸 속의 세포를 떠올려 보라. 모든 세포는 똑같은 유전자와 DNA를 지닌다. 하지만 뇌에 넣으면 뇌세포가 되고, 피부에 넣으면 피부세포가 된다. 하나의 코드가 무한한 다양성을 낳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심층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뇌도, 피부도, 그 무엇도 진짜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토라는 우주의 심층 구조다. ‘구조’라는 말이야말로 정확한 표현이다. 그것은 순수하다. 철저히 형식적이다.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 토라를 집어넣으면, 그 밑바탕에 깔린 논리가 세속적인 사물들의 옷을 입기 시작한다. 어떤 하위 구조들은 드러나고, 어떤 하위 구조들은 움츠러든다. 어떤 관계들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마침내 당신은 하나의 ‘사물’을 얻게 된다. 상자거북, 국제 공산주의, 아프리카… 뭐든. 구조를 찾으려 하지 않으면,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구조를 찾으려 한다면, 너무도 분명하다.
히브리 성경의 결정적 순간에, 모세라는 이름의 사람이 태어나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꾼다. 만약 당신이 히브리 성경의 세계 속에 사는 히브리인이라면, 당신에게 토라는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천사라면, 토라는 다른 무언가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세상이 창조되기 974세대 전의 하느님이라면, 토라는 이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끝없이 많은 가능성을 잉태한 경로들과 관계들, 의존성들의 집합일 뿐이다. 하나의 씨앗이다.
그 씨앗을 이해한다면, 그 씨앗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카발라다. 나머지는 모두 주석일 뿐이다. 매우 중요한 주석이다. 각 주석이야말로 벗겨져 버리는 피부세포 한 개와 사고하는 뇌 한 개의 차이를 만드는, 그런 종류의 주석이다.
각주:
1: 모세는 그의 형제인 아론(Aaron) 의 도움을 받아 사명을 수행했는데, 아론은 카발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마에 쉠 하메포라쉬(Shem haMephorash, 하나님의 밝혀진 이름)를 새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질량(mass)은 바리온(baryon) 들에 의해 운반된다. 유사분열에서 DNA는 그 사촌 격인 RNA의 도움을 받는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티그리스 강 건너의 친족 국가인 이란(Iran) 과 무역 파트너이자 동맹 관계였다. 매사추세츠는 대륙군(Continental Army)의 뉴잉글랜드 지부, 곧 베네딕트 아널드(Arnold) 가 이끄는 부대의 훌륭한 방어를 받았다.
2: 공자와 연결되는 R‑N 어근은 분명 “인(仁, ren)”이다. 인은 공자의 논어(Analects) 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인자(仁愛)의 개념이다. 논어 자체는 질량의 보완물인 에너지(energy), 유사분열의 후기(anaphase), 메소포타미아의 아누나키(Anunnaki), 아널드의 캐나다(Canada) 원정과 동족어(cognate) 관계에 있다.
3: 최초의 “언덕 위의 도시(city on a hill)”는 예루살렘이었고, 그 위의 성전은 모리아 산(Mt. Moriah)에 서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다윗 왕은 성전 터를 600세겔에 샀고, 솔로몬 왕은 성전을 600달란트의 금으로 장식했다. 헤롯 왕은 나중에 성전을 길이 600피트, 너비 600피트 규모로 재건했다. 미국 수도 워싱턴의 이름 뒤에는 “DC”라는 글자가 따라붙는데, 로마식 게마트리아에서 DC는 600을 뜻한다.
4: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라는 이름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조지(George)”는 그리스어로 “농부”라는 뜻인데, 이는 히브리어로 “흙(dirt)”을 뜻하는 이름 “아담(Adam)”과 명백히 연관된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난 뒤, 자신이 만들어진 그 흙을 “경작하라”는 형벌을 받았다. “워싱(washing)”은 영어로 “물속에 넣다(to place under water)”라는 뜻을 가지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물을 건져내다(to draw out of the water)”라는 뜻의 “모세(Moses)”와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washing”은 또한 “깨끗이 씻다(to cleanse)”라는 뜻을 가지고, “ton”은 ‘도시(town)’를 뜻해 폴리스(polis)나 국가(state)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조지 워싱턴”이라는 이름은 아담과 모세 모두와의 유사성을 암시할 뿐 아니라, “국가를 씻어내는 자”, 즉 부패와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국가를 정화하는 자라는 추가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