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사들의 땅의 형태

ko생성일: 2025. 6. 19.갱신일: 2025. 6. 22.

아론은 신비로운 거대한 도서관에서 각종 신비의 책, 천사의 언어, 그리고 군사 요새에 관한 진실을 탐구한다. 군사적, 종교적, 그리고 인간적인 교차점에서 천사들의 무지와 순수, 그리고 몰락을 둘러싼 대서사가 펼쳐진다.

제19장: 천사들의 땅의 형태


아침, 2017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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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순간 나는 눈앞의 광경에 완전히 방향을 잃었다. 그러다 거대한 어둠의 형상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선반. 선반들이 끝도 없이 쌓여 있다. 마치 흠 잡을 데 없이 닦인 대리석 바닥에서부터 너무 높아 정확히 볼 수 없는 천장까지 이어진다. 선반이 빼곡히 차 있어 방이 얼마나 큰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어둡긴 했지만 완전히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방 전체가 장미빛 빛으로 가득했고, 어딘가엔 이 거대한 선반에 어울릴 만한 거대한 창문이 있어 새벽의 빛이 스며드는 건 아닐까 했다. 선반을 지나면 또 선반, 그 너머에도 또 다른 선반뿐이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카드 목록 같은 것의 흔적도 없었다. 책의 제목을 읽으려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읽을 수 없었다.

“소멸의 이름은, 정말로 긴박하게 곤경에 처했을 때, 지금 너를 곤경에 빠뜨린 것과는 다른 무리의 깡패가 괴롭히길 간절히 바랄 때만 사용해.” — 내가 다른 싱어들에게 했던 말이다. 거기 있었던 나는, 유엔송의 국장에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압박을 받으며, 어쩌면 영원히 천재적으로 기억될 책략으로 소멸의 이름을 써서 탈출했다. 내 산안토니오 연락책이 말한 "보완적 상황"일 것이라는 곳으로. 그게 나쁜 곳이어야 옳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이곳, 성당만 한 도서관이다.

악마나 괴물이 있을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잘 자고 온 터라 잠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긴장돼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고, 내 몸이 안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도 없었다. 아나는 어디에 있는가? 잠깐 텔레파시로 감응을 느꼈지만, 그녀는 포로 같지 않았다. 오히려 구출 하러 오겠다고 하는 말투였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유엔송 본부를 찾아내고 잠입할 수 있다는 건가? 에리카와 다른 하우스메이트들은 어디에 있을까? 말리아 응오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그녀가 사라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중요한 건, 여기 어디인가? 당연히 나쁜 곳일 터, 아니었다면 이름이 여기로 나를 데려오진 않았겠지.

그래서 평상시처럼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던 대로,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유엔송이 내 스크롤 휠을 빼앗아 갔으니 루미너스 네임(빛의 이름) 스크롤을 쓸 수 없어 그냥 이름을 말로 발음했다. 아주 작은 위험을 감수했다. 유엔송이 루미너스 네임을 탐지하는 일은 경찰이 길모퉁이에 의도적으로 쓰레기를 버리게 유도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독점 네임이었다.

그 순간 도서관이 찬란하게 빛났다. 책을 집어 들었다. 이상했다. 제목이 —

존 디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궁정에서 활동하던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다가, 이후 마법에 몰두했다. 과학으로는 자연의 표면만을 알아낼 뿐 진정한 본질은 모르리라 믿고, 안내자를 찾았다.

한 명이 나타났다. 에드워드 켈리는 자신의 몸을 빌려 영령들의 비밀을 전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는 사기꾼으로 악명 높았고, 위조 혐의로 감옥에서 막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디는 매우 관대하게도, 영이 굳이 사기꾼을 매개로 택했다면자신이 그걸 의심할 까닭이 있을까 하고 받아들였다.

켈리는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며 천사들이 말한다고 했다. 무슨 말을 했냐고? 안타깝게도 켈리도 디도 천사의 언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인간 세계에서는 애녹 이후로 잊혀진 언어였다. 이어진 번역 작업은 잉글리시–에녹어 사전, 즉 천상의 언어로의 열쇠를 내놓았다.

물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에녹어의 문법과 구문이 엘리자베스 시대 영어와 똑같은 게 너무 수상하다고 지적했다. 또 천사의 언어로 "악"이 "마드리드"고, 마드리드는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의 숙적이던 스페인의 수도였다는 점. "왕국"이 "런도"라든가...쉽게 눈치챌 얘기다. 켈리가 자기 의견을 살짝, 아니 꽤 많이 주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현대적 표현으론, 매체가 메시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갈라지고 진짜 천사들을 만났을 때, 모두가 완벽한 에녹어를 쓴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다른 언어도 쓸 줄 알았지만, 유독 아람어만 못하고 그 외엔 다 알아듣는다. 가장 자연스럽게 쓰는 건 역시 에녹어.

“에딘버러 아우구스부르크 트론하임 런도 알비온 튜더스.” 이게 천사의 언어로 "인간 왕국에 주님께서 평화를."라는 뜻. 이어서 “필립 왕 파피스트 폭군 메리 여왕 오브 스코스 마드리드,” 즉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을 모아 악에 맞서야 한다."는 말이다.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예상되는 일. 어디서나 기본 구조는 반복되니, 우연이란 없고 세상 어디서든 똑같은 틀이 반복된다. 다만 대개 더 정교하고 은밀하게.

내 에녹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겨우 글자를 떠올려 단어를 더듬더듬 읽는 수준. 그런데 소리 내 읽을 수는 없었다. 에녹어로 쓰인 절반은 소리내자마자 베일 너머의 고대 세력을 부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만 뜻을 더듬었다.

책 속 첫 문장을 해석하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났다. 이 도서관엔 나 외에도 누군가 있다는 뜻이다. 이곳이 유엔송의 비밀 감옥에 대한 "보완적 상황"이라면, 내가 좋아할 인물은 아닐 것 같았다.

템페스투어스 네임(폭풍의 이름) 19음절을 소리 내어 말하고, 마지막 한 음절은 곧바로 위협을 감지하면 쓸 수 있게 혀끝에 올려두었다. 에녹어 책을 방패 삼아 들고, 내 모습을 최대한 감추려 책장에 딱 붙었다. 만약 누군가 날 찾으려 해도, 선반이 내 위장을 크게 도와줄 터였다 —

어떻게든 내 관자놀이에 총이 닿았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움직이지 마.” —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 로 가득했다.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젊은 아시아계 여성. 검은색, 기능성 강한 옷차림. 바이크 가죽과 특수부대 전투복을 혼합한 듯. 그런데 저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역시 깡패들. 딱 때맞춰 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템페스투어스 네임이 그녀의 총보다 나을지 확신이 안 섰지만, 시도해볼 생각은 사라졌다.

“책 내려놔!”

나는 조심스레 책을 선반에 돌려놓았다. 바닥에 떨어뜨리라는 뜻이겠지만, 나는 책을 바닥에 내려놓는 건 재수가 없다고 믿는다. 운이 필요할 때는 더더욱...

“누구야? 어떻게 들어왔어?”

“내 이름은 아론이에요. 사고를 쳐서 소멸의 이름을 썼더니 10분 전쯤 이곳으로 오게 됐어요.”

최소한의 사실, 최대한의 비밀 유지. 그녀의 시선이 책 대신 주위의 빛 구에 옮겨갔다. “저건 뭐야? 어떻게 생긴 거야?”

“루미너스 네임이요. 어두워서 안 보여서.”

“발언이야, 두루마리야?”

“발언.”

그녀는 끅끅대며 분노를 삼켰다. “너, 그걸 ... 네가 ... 여기가 어디인 줄이나 알아?

모른다.

“여긴 ‘마운트 볼디 전략 천사 예비군 기지’야.”

이제 완벽하게 납득이 됐다. 나는 바보였다.

II.

‘대행진’ 시기,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구름들은 거대한 공중 요새로 변했다. 멕시코만에선 대천사 우리엘의 거대한 허리케인이 되었고, 전 세계 다른 곳에선 다수의 소규모 천사 요새 도시가 나타났다.

알고 보니 고대인들의 보편적 믿음 — 하늘, 구름 위 어딘가 천사들이 사는 천당이 있다 — 는 꽤 맞는 말이었다. 우리엘이 세상에 신성한 빛의 흐름을 차단하며, 천사들과 그 천국은 삭제됐다. 구름을 물방울 덩어리로 리포맷했다는 얘기다. 하늘이 갈라진 뒤, 일부는 다시 본디 천사적 형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천사들은 수천 년 간 은유적 존재여서 방향을 잃었다. 헬리콥터가 하늘 요새에 착륙해 거래를 요구하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행히, 천사들에게는 사유 재산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상황은 무의미해졌다. 구름은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주위에서 형성했고, 대부분의 시간은 기도와 찬양에 바쳤다.

지식 교환?

천사들은 엄청난 양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신학이었고, 쓸만한 건 드물었다. 신에 대한 비밀 정보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허탕. 신에게 만들어진 건 기억하지만, 다 말로는 하는데, 모두 난해하고 인간의 신비주의가 오히려 명확해 보일 정도였다.

기술 교환?

천사들은 기술이 없다. 신의 이름(디바인 네임)도 많이 알지 못한다. 아는 몇 개조차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협박, 협상, 심지어 고문도 천사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사연은 옛 닉슨 정부 때 "러시아에 질 수 없다!"며 ‘국가가 해야 할 일’로 실행된 무시무시한 시험에 있었다.

군사 동맹?

이야기가 달라진다. 천사들은 어디서든 불타는 검을 떠올려 적을 박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전략이라는 개념, 지정학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러시아와 싸워줄래?" 했더니 오직 러시아가 ‘악’인가 아닌가만 궁금해했다. ‘맞다’고 하니 왜 아직 전쟁을 안 했는지 반문했다. “바로 전쟁하는 게 아니라, 우방을 늘리고 적을 포위해 개전 억제 상태를 만들어 최소 희생으로 최대 양보를 얻는 거야…”를 설명하려 해도 천사는 못 알아먹는다.

악당이면 — 박살. 아니면 — 평화롭게 지냄.

천사들에게 현대 시민사회의 절차에 참여시키려는 시도도 모두 실패. 경제학? — 신이 공급해 주신다. 유엔? — 악당과 왜 이야기하는가 smite 하면 그만. 관광, 고고학 개방 요구? — 신만이 알면 된다, 신은 어디나 계시니까.

딱 한 가지, 천사들이 이해하는 게 있었다. 믿음.

모르몬교회 대표 스펜서 킴볼은 헬리콥터 편대로 자이언 국립공원 위 천상요새에 갔다. 요새의 천사들에게, 150년 전 조셉 스미스가 모로니라고 하는 천사로부터 신의 계획이 기록된 금판을 받았다는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로서 아메리카를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 이 모든 지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자신이 그 현 대표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천사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흠... 모로니라는 존재는 처음 듣는데."

그리고

"잠깐, 신에게 _아들_이 있다고?!"

요컨대 천사들은 인간의 종교에 익숙하지 않았다. 신에게서 특별한 계시도 없음에 그럴 수도 없겠구나 싶게 대응했다. 혹시 더 높은 신의 총애를 받는 천사 부족(그게 모로니라면)이 있고, 그쪽은 직접 계시를 받았다면 중요 한 뉴스다. 신에게 아들이 있다면, 중요한 이야기이고, 자신들이 그걸 모른 채 있었다는 사실에 약간 삐쳤다. 킴볼씨, 진짜 맞죠?

킴볼씨가 전적으로 모두 진실이라고 확인하자, 요새 전체의 천사들이 몰려나와 모르몬교로 개종했다. 인간들로부터 받은 모든 계시/명령을 천사들에게 다 보내달라고 했다.

이 소식이 지상 종교계에 화상을 입혔다. 유대교, 힌두교, 가톨릭, 개신교, 불교, 이슬람 — 모두 패턴은 같았다. 헬기를 타고 요새를 찾아 천사들에게 “신이 우리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셨다”고 알린다. 천사들은 격하게 감격, 종교를 통째로 갈아타고 새로운 종교 지도자들의 요구를 모두 다 들어줬다.

곧 천사들이 엄청나게 잘 속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무슬림 선교단이 이미 동방정교회가 선점한 요새에 도착한 것이다.

이맘이 각별히 공손하게 천사들에게 진실을 알렸다. 신에게는 아들이 없다고, 자기는 신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알리러 내려온 사실을 안다고.

천사들은 가브리엘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엄청난 기쁨. 모두 죽었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럼 그 전의 동방정교회 신부들은 도대체 뭘 잘못 알았던 걸까? 무슬림들은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무함마드의 건은 진짜로 맞다”고 강조.

천사들은 정정해줘서 고맙다며 곧바로 샤리아를 따르고 꾸란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몇 주 뒤, 분노로 들끓는 그리스 정교회 수도사들이 헬리콥터로 내렸고, 무슬림들은 틀렸다는 점(그리스도가 분명 신의 아들이다, 무함마드는 잘 모른다는 점)을 해명했다.

천사들은 혼란과 분노에 휩싸여 두 측에 “둘이 알아서 정리해서 다시 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수도사들과 이맘들이 요새 입구에서 천사들과 서로 심하게 다투기 시작. 양쪽 모두 상대를 거짓말쟁이라 비난했고, 마침내 천사들이 평소 품었던 핵심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정확히,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알고 보니 천사들의 문제는 순진함보다 훨씬, 훨씬 깊었다.

천사학자들은 그 10년동안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사는 거짓말, 속임수, 배신, 전략, 심지어 수사(修辭)의 개념이 없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 천사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 건 매우 쉬웠다 — 악을 빼고는, 천사들은 악에 대한 격렬한 생리적 혐오를 보였다.

그래서 교황은 천사 무리를 모아 가톨릭이 유일한 진짜 종교라는 선언문에 서명시키고, 달라이 라마, 동방정교회 총대주교, 예루살렘의 대랍비도 각자 그런 선언문에 인간 천사들을 동원했다. 소련에는 천사 합창단이 붉은광장을 행진하며 공산주의가 유일한 진리라 외쳤다. 어떤 사업가는 정중한 요청만으로 불타는 검, 거대한 황금 후광을 얻었다.

천사들 중 사람이랑 제일 많이 소통하고 가장 많이 속았던 일부는 조금씩 진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눈속의 황금빛이 점차 어두워지고, 화려한 황금 날개가 시들고 빛을 잃으며, 불타는 검도 불꽃에서 잿더미로 변하기 시작한다. 천사의 후광은 변색되고 녹슬었고, 순백의 예복은 점점 회색, 때묻은 빛으로 바뀌었다. 구름 요새에 점점 묻혀내리다가, 구름이 그저 물방울에 불과한 듯 아래로 뚝 떨어져 땅에 쾅 하고 부딪쳤다.

이들은 바로 타락 천사들이다.

타락 천사는 악하지는 않았다. 혼란스럽고, 환멸되고, 약간 우울했다. 그들은 순수함을 돌려받고 싶었고, 거짓과 속임을 잊고 다시 모든 것을 믿고 싶었다. 신을 계속 찬양하지만, 이제 그들의 기도는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로 끝났다. 마치 먼 존재에 대화하듯이.

1984년, 처음 모르몬 선교가 있은 지 10년 뒤, 천상의 90% 이상이 타락했다. 요새는 비어 있거나 무늬만 구름이 되어 비를 내리다가 사라졌다. 수백 년 동안 천국이 단지 은유적·상징적 공간이라 하늘과 전혀 상관없다는 믿음, 그리고 10년 동안은 망원경만 있으면 눈으로 볼 수 있던 진짜 하늘 위의 천국, 이제 또다시 단순한 은유로 돌아갈 위기였다.

천사가 끝까지 잘 했던 건 악마 사냥이었다. 레이건 정권 때 대통령은 남은 천사들을 ‘국가중요자산’으로 선언해 군대가 이를 24시간 보호하게 했다. 미국 상공 14개 남은 요새는 ‘전략 천사 예비군’이 되어 군대가 경비했고, 사기꾼, 선교사 등 천사의 순수를 오염시킬 수 있는 인간들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다. 게다가 이 시점엔 비행기, 헬리콥터도 대부분 작동하지 않아서, 요새까지 가는 유일한 공식 루트는 정부에서 관리하는 자동 도르래 시스템뿐이었다.

전략 천사 예비군 허가 없이 진입할 시 형벌은 사형이며, 실제 군이 집행했다. 게다가 천사 자신들도 이제 자신들의 위험성을 잘 알게 되어 규칙을 엄격히 지켰다. 단순히 죽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남은 마지막 순수의 거점을 너로 인해 더 심연으로 밀어 넣는다는 자괴감, 그것이 더 끔찍했다.

III.

“언제 루미너스 네임을 말했죠?” 여자가 물었다.

“10분쯤 전이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자는 날 당장 죽이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듯, 억지로 가라앉힌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해병대가 도착하려면 대략 30분 남았어. 여기 전부 뒤지고 안전하게 빠질 시간이네, 그치?” 수천 개의 선반을 가리키며 죽일 듯 노려봤다.

“검색?”

“천사들은 인류 미래에 결정적인 정보를 가진다. 나 몇 달을 들여 들키지 않고 올라오는 방법을 알아냈는데, 지금 ...”

나는 말한 뒤 곧 후회할 뻔했지만, “무엇을 찾으시는지 말씀해주시면 도울 수 있을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미친 듯 날카로운 말을 쏟아낼 듯 했지만, 참고 한참 뒤 “타오스 하우스 기록, 112권, 얇고 파란색, 선반 2270, 층 36”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거의 인간 같지 않게 빠른 속도로 선반을 뒤졌다.

하는 일이 없어 나도 똑같이 뒤졌다.

정확한 주소가 있지만, 문제는 내가 ‘에녹어’ 숫자 체계를 모른다는 것. 심지어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선반에 금색으로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로마 숫자처럼 알파벳을 숫자로 쓰는 건가 했다. 동시에 한 글자가 여러 번 반복되는 건 없었고, 크고(알파벳 뒷순서) 큰 글자가 작은 글자 앞에 오는 것도 없었다.

히브리 숫자 체계는 ‘게마트리아’로 불리며, 매우 우아하다. 알렙은 1, 베트는 2, 10번째는 10, 11번째는 20... 100은 그 바로 다음, 200은 더 다음 식. 마지막 타브(400)까지. ‘게마트리아’로 온갖 기교를 부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네로 황제가 세상에서 최악 이고, 누구도 직접 욕하면 죽이는 세상이라면, "이해 있는 자는 짐승의 수를 알라, 그 수는 인간의 수니 666"이란 말로 에둘러 암시한다. 신문에 네 글자 합계가 666이 되는 건 네로 카이사르 뿐이니 모두 알아챈다.

히브리 숫자엔 동일 문자가 두 번 나오지 않는다. 가장 뒤쪽 문자는 항상 오른쪽이다. 그런데 이곳은 ‘게마트리아’도, 그 에녹 식도 아니었다. 글자가 너무 많았다. 히브리 숫자가 한정된 자릿수만 쓴다면, 에녹어 체계는 수십 자리도 있었고, 항마다 자릿수도 달랐다.

생각을 굴려 에녹어 알파벳 순서를 외우고, 영어 알파벳과 일대일 대응시켜가며 연습했다. 제일 아래 큰 은글씨는 선반 번호임에 틀림없다. 내가 있던 선반은 ABHI. 그 옆은 CHI, 그 다음 ACHI, 그 다음은 BCHI, 그 다음은 ABCHI, 그 다음은 DHI...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정말 행복했다. 아나와 함께하는 시간 외에는, 복잡한 패턴, 구조를 짜내려고 고민하는 게 내게 주어진 성소 같은 일이었다. 이 모든 구조, 작은 빛살을 통해 아담 카드몬(최초의 인간, 본체 구조)를 잠깐이라도 엿본 듯한 경건함이 있었다. 그게 내가 진심으로 잘하는 거고, 언제나 마음 편한 유일한 일이었다.

선반 숫자는 존 네이피어의 ‘로케이션 산술(location arithmetic)’ 체계였다. 깨달음이 서서히, 화창한 새벽처럼 마음에 밀려왔다. 사실상 2진법: 2^0은 A, 2^1은 B, 2^2는 C, 2^3은 D, ... 100은 2^6+2^5+2^2, 즉 CFG; 200은 2^7+2^6+2^3, 즉 DGH. 곱하기 2는 알파벳 한 칸씩 뒤로 밀기, 더하기는 문자 결합, 두 번 나온 글자는 다음 글자로 압축. 프리드먼 추측에 관한 카발라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진짜 천사들다운 숫자 시스템이었다.

2270은 영어로 BCDEGHL, 에녹어로 un-or-gal-ged-pa-drux-na. 선반 un-or-gal-ged-pa-drux-na로 달렸다 — 딱 여자를 마주치기 직전에 다다랐다.

“흥미롭네.” 그녀는 호기심 섞인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스크롤 휠을 꺼내 아마도 상승의 이름을 뽑아냈다. 36층으로 솟아올랐다가 얇은 파란 책을 낚아채 돌아왔다.

“땅으론 어떻게 내려가죠?”

그때 눈에 반짝임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올라온 대로 간다만, 너는... 알아서 해!”

그리고 뛰쳐나가 버렸다.

내가 잘 해낼 거라 기대하긴 어려웠다. 구름 끝에 닿으면 상승의 이름을 말해서 낙하를 조절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순전히 수직 하강일 뿐. 해병대에 유엔송 요원이 있다면 — 사실상 여자의 확신대로 빛의 이름을 추적한다면 확실하다 — 나 또한 바로 들킬 것이다. 마운트 볼디 전략 예비군 기지는 어느 부근일까? 대부분 오지 위에 있을 텐데. 어떻게든 안전하게 내려가도 생존확률은 낮다.

그래서 그녀를 쫓았다. 적어도 스크롤 하나만큼은 빌릴 수 있을지도.

나는 그녀만큼 빠를 리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달렸다. 구름으로 파인 복도를 따라, 이상할 정도로 내부에서 빛나는 길을 내달렸다. 스테인드글라스 창 너머 첫 햇살이 비치는, 성당을 방불케 할 만큼 웅장하고 정교한 홀을 뛰어다녔다. 이름이 붙이라 어려운, 거대한 투석병과 장비들이 가득 펼쳐진 전쟁방도 지나쳤다. 결국 나는 커다란 발코니에,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흰 구름 대지 위에 섰다.

이미 늦었다. 해병 스무 명쯤이 구름 위에 집결해 있었다. 멀리선 그들을 이 구름 요새로 올려 보내는 케이블카가 눈에 보였다. 그들은 천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집에서 봤던 타락천사가 아닌, 진짜 아름답고, 키 크고, 황금빛 눈과 날개가 번뜩이는 장엄한 천사들이었다. 내 앞엔 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지만, 구름 위 검은 그림자처럼 눈에 띌 테고, 해명도 길게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발길을 돌려 요새 안으로 들어가 다른 출구로 나왔다. 또 다른 발코니. 키 큰 아시아 여자가 몸을 숙여 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등장하자 그녀는 번쩍 돌아서 총을 들이댔다가, 날 알아보고 안도하는 듯한 태도. "또 너구나." 그녀는 다시 밖을 둘러보고, "해병은 떠난 것 같은데, 속지 마. 반드시 남아 지켜보는 자가 있을 거야. 여기 있으면 쫓겨날 테고, 탈출 시도하면 바로 들킨다." 마치 세상에서 별로 심각하지 않은 문제인 양 침착하게 말했다. "아론, 아이디어 있어?"

햇살이 창밖으로 쏟아졌다. 하얀 구름은 빛을 반사하고 굴절시켜 눈부시게 빛났다. 기독교 음반 재킷에서나 볼 법한 천국 같다.

나는 노래를 불렀다. 이름이 떠올라, 알고 있던 것도 아닌데, 산의 뿌리처럼 깊은 지식 창고에서 불쑥 솟았다.

나는 투명해졌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그 덕에 다시 보이게 됐다. 그녀 역시 놀랐지만 좀 더 품위 있게.

“어떻게 한 거야?”

"이름이요!"

“어디서 배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모든 게 맞춰졌다. 아나가 유엔송 시설에서 날 구하려던 시도, 말리아 응오가 사라 얘기를 한마디도 안 했던 점. 다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나가 내 컴퓨터와 함께 집에서 탈출했고, 아직도 새로운 이름들을 찾던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카발라 결혼을 통해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다시 한 번만, 내가 외울 수 있도록."

좀 더 야비한 사람 같았으면, 방금 나를 버리고 갔던 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점, 총으로 위협했던 점 등등을 언급했겠지만, 나는 싱어다. 신의 이름을 필요한 이에게 전하는 게 내 의무이기도, 솔직히 신나서 제정신이 아니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스펙트럴 네임(스펙트럼 이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둘 다 투명해졌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사실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아마 나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나 보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따라 요새 하부를 거쳐 구름 가장자리 외벽에 다다랐다. 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어 다시 뒤를 보았다.

내가 본 것을 묘사하자면 —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이번엔 도저히 묘사 불가. 여름 평원의 천둥번개 구름이 부풀며, 마치 거대한 전함처럼 장엄하고 두려움을 주는 모습을 본 적 있나? 그런 구름이 고작 소나기를 뿌리고 따뜻한 전선과 부딪혀 사라질 운명이란 걸 믿을 수 있나? 그 난간에서, 등 뒤로 펼쳐진 천사 요새를 올려다봤을 때, 구름이란 원래 이래야 했다는, 세상 창세 때의 구름, 허공에 떠 있는 요새 도시, 신의 영광 그 자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곧 벽 끝 탑에 다달았고, 꼭대기엔 카약 한 척이 놓여 있었다.

“저건 카약이잖아요,” 나는 마법이 풀린 듯 말했다.

"저건 날아다니는 카약이야."

"-"

그녀가 쏘아보는 눈길에, 지금 "플라이약"이나 "스카이약"이란 말을 꺼냈다간 바로 죽을 게 분명했다.

“탈 거면 타. 내 이름은 제인이라고 해.”

"저는 아론이요."

"아까도 들었어."

나는 그녀 옆으로 비좁게 끼어 앉았다. 몸이 너무 닿아 불편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인은 노를 내게 던지더니, 갑자기 앞으로 몸을 굽혀 카약이 구름 끝을 벗어나 공중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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