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ט: 유엔 총회

ko생성일: 2025. 6. 19.

1972년 유엔 총회에서 지옥(Thamiel)이 새 회원국으로 등장해 연설하는 장면과, 현장 반응 및 다양한 해석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

막간 ט: 유엔 총회

그리고 사탄은 그들에 맞서 세계 환경에 섰더라.

— kingjamesprogramming.tumblr.com

1972년 12월 14일 뉴욕시

“여성 여러분, 신사 여러분, 그리고 사무총장님.

우리는 자랑스러운 민족입니다. 오늘 이곳에 참가한 여러 신생국가들처럼, 우리도 제국주의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국가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모두가 항복을 충고할 때에도 힘을 얻어 투쟁을 계속하도록 만든 것은 우리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부심으로 오늘 이 자리, UN의 가장 새로운 회원국으로서 세계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괴물이 아닙니다. 여가 시간에는 바이올린 대회에도 출전합니다. 시각장애 아동을 돕습니다. 건강에 좋은 식물성 식품의 중요성을 알립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결코 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낯설긴 하지만, 우리 역시 여러분 모두와 동일한 가치를 공유합니다.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도 같습니다.

미국의 꿈이 환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인종, 피부색, 신앙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철조망을 치지 않고, 난민을 실은 배도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엠마 라자루스의 옛 말을 가슴에 새깁니다. 지친 이들, 가난한 이들, 자유를 갈망하는 군중, 넘쳐나는 땅의 비참한 이들, 집 없고 난파당한 이들 모두를 나에게 보내라. 그리고 여러분은 그렇게 보내셨습니다. 절박함으로 우리 문을 두드리는 인류의 물결은 엘리스 아일랜드의 기억마저 무색하게 할 정도이고, 우리는 누구도, 아니 가장 천한 자일지라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의 노동자 낙원이 꿈꾸는 것을 우리는 이뤘습니다. 계급 구분은 없습니다. 노예와 술탄, 주식중개인과 선원이 똑같이 대우받습니다. 만능의 달러는 땅에 떨어졌고, 굶주림이나 병을 걱정하지 않으며, 집 없이 추위에 떠는 일도 없습니다. 사유 재산은 사라졌으나, 아무도 그 결핍을 느끼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영원한 불안과 동요’라 했지만, 우리나라 안에서는 그 정반대가 지배합니다.

이견 있는 자를 박해하지 않습니다. 언론을 검열하지 않습니다. 오염시키지 않습니다. 남녀를 동등하게 대우합니다. 어떤 종교든 자유롭게 믿거나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폭탄을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법 체계는 편견이 없으며, 처벌은 언제나 공정합니다.

아니요,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전복 세력이라거나 제국 건설을 꾀한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는 이웃을 위협해 종속국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따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칼이 아니라, 수백만 인류의 억눌린 바람을 통해 전파됩니다.

16년 전, 흐루쇼프는 냉전의 장갑을 집어 던지며 말했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너희를 파묻을 것이다!’ 여러분,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역사가 우리 편임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파묻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 여러분 모두가 땅에 묻힐 때, 지금 우리를 적으로 여기는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도 모르는 새 우리와 한편이었음을 깨달으리라 믿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적이라 말하고 그러길 바라지만, 내심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각자의 동료입니다. 시위 진압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불렀고, 선거에서 이기고 싶을 때마다 조언을 구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아낌없이 도왔습니다. 여러분의 영광은 모두 우리의 도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도구를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단지 아주 작은 희생만을 받고 빌려주었습니다. 국민총생산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무역적자도 생기지 않는 미미한 희생 말입니다.

여성 여러분, 신사 여러분, 사무총장님. 이 방에 저의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영혼 깊이 동지였고, 이제 명목상으로도 동지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 감사드립니다.”

타미엘이 연설을 마치고 잠시 연단에 남아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길 기다리는 듯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두 번째 머리는 여전히 무언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연기와 함께 그를 둘러싼 공기는 검은 날벌레처럼 소용돌이쳤고, 그의 피부는 희미한 조명 아래 암덩어리로 뒤덮인 듯 보였지요. 그러나 대사들을 잠잠하게 만든 것은 단순한 두려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외교관, 즉 거짓말쟁이였고, 잠시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서 거짓의 왕자에게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뜨거운 바람이 몰아쳐 두 명의 대표를 갈라놓고 명패를 흩뿌렸습니다. 가운데에 유황 연기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오른쪽은 아이티.

왼쪽은 온두라스.

그리고 가운데엔: 지옥.

명패에는 멋스럽게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하 원문 독자 코멘트(일부)

  • “악마가 바이올린 경연에 나가는 건 익숙한 설정인데, 왜 시각장애 아동과 식물성 식품이 언급되죠?”
    • “식물성 식품은 에덴동산의 사과와 관련 있는 듯.”
    • “seitan(세이탄: 밀고기)이란 말장난은 어떨지…”
    • “‘시각장애 아동을 돕는다’가 아니라, ‘아이들을 눈멀게 만든다’는 의미 아닐까요?”
  • “사람들이 외교관, 즉 ‘거짓의 왕자’에게 경배한 대목이 ‘The Devil and Daniel Webster’를 떠올리게 하네요.”
  • “지옥 대사관은 666번가에 있을까요?”
  • “타미엘이라는 이름은 카발라에서 사탄, 혹은 사마엘과 연관, 또 불 붙은 명패는 루시퍼/라이트브링어/불을 가져온 자의 상징일 수도 있죠. 또, ‘아이들’은 무지 속에 있는 원시 인류, 즉 타미엘이 오히려 눈을 뜨게 해준다는 해석도 가능.”
  • “작중 ‘우리도 모르게 네 편이었다’는 블레이크가 밀턴을 두고 ‘악마의 편에 섰음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 것을 언급한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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