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하지만 다루기 어려운 금속 티타늄이 실험실의 호기심에서 항공우주와 의료를 지탱하는 핵심 공학 재료가 되기까지의 역사와 그 기술·산업적 의미를 살펴본다.
지각에는 티타늄이 아주 많이 들어 있다. 티타늄은 지각에서 아홉 번째로 풍부한 원소다. 질량 기준으로 보면 지각에는 탄소보다 거의 30배, 구리보다 거의 100배 더 많은 티타늄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풍부함에도, 인류 문명이 티타늄을 금속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티타늄 이산화물은 페인트 안료로 조금 더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티타늄은 산소와 다른 원소들과 너무 잘 결합하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금속 형태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엔지니어는 티타늄이 뭐든 달라붙는다고 해서 티타늄을 “거리의 여자(streetwalker)”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구리는 기원전 7000년부터, 철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류가 사용해 왔지만, 티타늄은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발견되었고, 금속 형태로 생산된 것도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1945년까지만 해도 티타늄은 상업 생산이 전혀 없었고, 금속 티타늄은 실험실에서 극소량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아, 해마다 수천 톤 단위로 티타늄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다시 10년이 지나자, 티타늄은 지구상에서 가장 진보한 항공우주 기술의 말 그대로 골격을 이루게 된다.
미 국립연구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에 제출된 한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톤 단위 구조용 금속(tonnage structural metal) 산업의 탄생은 드문 사건이다. 지난 100년[이제는 거의 150년] 동안 그런 탄생은 세 번밖에 없었다 – 알루미늄, 마그네슘, 그리고 티타늄 – 그리고 새로운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티타늄은 어떻게 완전히 쓰이지 않던 상태에서 핵심적인 항공우주 기술로까지 발전했을까? 이 과정은 기술 발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한번 살펴보자.
티타늄은 1790년, 영국의 성직자이자 화학자인 윌리엄 그레거(William Gregor)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그는 콘월(Cornwall)의 검은 모래 속에 섞여 있던 흰색 산화물에 포함된 금속을 기존의 어떤 금속으로도 식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1795년, 프로이센의 화학자 마르틴 클라프로트(Martin Klaproth)는 루틸(rutile)이라는 광물에서 티타늄을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티타늄이 산소와 강한 결합을 형성한다는 점을 보고, 클라프로트는 그리스 신화의 티탄(Titan)을 따서 이 금속을 “티타늄(titanium)”이라 이름 붙였다.
티타늄은 다른 원소와 너무 잘 결합하고 오염되기도 쉬워서, 순수한 상태로 얻기가 극도로 어렵다. 그래서 그 후 100년 동안 티타늄은 주로 실험실의 호기심거리 정도로 여겨졌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스웨덴 과학자 두 명이 순도 94%의 금속 티타늄 생산에 성공했고, 1910년에는 GE(General Electric)의 과학자 매슈 헌터(Matthew Hunter)가 더 나은 전구 필라멘트 재료를 찾는 과정에서 이들의 공정을 변형해 금속 티타늄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업적으로 쓸 만한 생산 공정이 개발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였다. 1930년, 룩셈부르크 출신 과학자 윌리엄 크롤(William Kroll)은 자택 실험실에서 티타늄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사염화티타늄(TiCl₄)을 마그네슘과 진공 상태에서 반응시켜 티타늄을 얻는 공정을 개발했다. 1938년까지 그는 티타늄 금속 50파운드(약 23kg)를 생산해 냈고, 이를 철사, 봉, 판재, 도금재 등으로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크롤은 자신의 공정을 팔기 위해 미국으로 왔지만, 그때는 성공하지 못했다.

1938년 크롤이 만든 티타늄 금속 샘플, Kroll 1955에서 발췌
같은 해, 미국 광산국(US Bureau of Mines)은 필립스(Philips)사가 수행한 티타늄의 유망한 물성 연구 결과에 자극을 받아 티타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필립스는 자체적인 티타늄 생산 공정을 개발했었다). 광산국은 여러 공정 중 크롤 공정이 상업적으로 가장 잠재력이 크다고 결론 내리고 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연구는 지연되었지만, 이르면 1944년부터 광산국은 **주당 100파운드(약 45kg)**의 티타늄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에서 15파운드 단위 배치로 티타늄을 만들고 있었다.
전쟁 후, 광산국의 티타늄 연구는 가속화되었다. 1947년까지 광산국은 크롤 공정의 스케일업에 성공하여, 다공성 스펀지 형태의 티타늄 금속(이후 이를 용해해 봉, 판재, 철사 등으로 만든다) 2톤을 생산했다. 광산국이 의뢰한 1948년 보고서는 티타늄과 그 합금이 공학적으로 큰 잠재력을 가진다고 결론 내렸다. 티타늄은 거의 스테인리스강만큼 강하지만, 무게는 40% 더 가볍다. 또한 부식 저항성이 매우 뛰어나고, 알루미늄에 비해 고온에서 강도를 훨씬 더 잘 유지했다. 이는 티타늄이 무게가 극히 중요한 동시에 고온에 자주 노출되는 항공우주용 소재로 크게 유망하다는 뜻이었다.
군은 광산국의 개발 진행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고, 육·해·공군 연구소에서 티타늄 샘플을 시험하기 시작하면서 티타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때부터 티타늄은 “경이의 금속(wonder metal)”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 금속은 군과 산업계 내에서 수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초기 홍보자들은 티타늄을 군함, 장갑판, 탱크, 트럭, 상륙정, 항공기 구조체, 공중 장비에 사용하는 것을 상상했다. 많은 방위산업 설계에서 티타늄이 알루미늄과 강철을 모두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 Simcoe 2018
1948년, 티타늄은 처음으로 상업 생산에 들어갔다. 듀폰(DuPont)의 소규모 공장은 하루 100파운드의 티타늄을 생산할 수 있었다. 첫 배치의 티타늄은 F‑84, F‑86 같은 군용 제트기에 실험적으로 사용되었다. 공군은 티타늄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제조사들에게 강철 대신 티타늄을 사용하도록 장려했고, 육군 병기국(Army Ordnance Corporation)은 100만 달러어치의 티타늄 금속을 주문했다.

F‑84, 위키피디아
언론에서는 티타늄을 “경이의 금속(wonder metal)”, “기적의 금속(miracle metal)”, “신데렐라 금속(Cinderella metal)”(오랫동안 간과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불렀다. 티타늄 생산 회사의 한 임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선정적인 잡지 기사들은 티타늄이 우주선, ‘원자 노(atomic furnaces)’, 각종 항공기, 잠수함, 철도 레일, 트럭 차체, 이동식 교량에 쓰이는 기적의 금속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Rowley 1972). 1950년에서 1952년 사이에만 20개가 넘는 회사가 티타늄 생산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제 막 태동한 티타늄 산업은 곧 난관에 부딪혔다. 1951년, 재료 자문위원회는 티타늄 제품 3만 톤의 수요를 예상했지만, 실제 출하량은 고작 75톤에 불과했다. 사실상 연구용으로 쓰기에도 빠듯한 양이었다. 생산업체들은 스테인리스강을 녹이고 압연하고 형태를 만드는 데 쓰이던 동일한 설비를 티타늄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는 매우 어려운 일로 드러났다. 티타늄은 강철처럼도, 다른 어떤 금속처럼도 거동하지 않았다.
티타늄은 “어떤 다른 재료와도 같지 않게 단조되지 않는다”(DTIC 1952)는 사실이 밝혀졌고, 프레스에서 프레싱(stamping) 작업을 하면 금형이 손상되었다. 티타늄 연삭(grinding)을 연구한 한 회사는 “티타늄은 강철과는 다르게 연삭된다. 강철의 효과적인 연삭에 대해 배운 것은 티타늄의 경우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민간 여객기에 티타늄을 처음 사용하려 했던 시도에서는, 결과물인 판재가 너무 취성(brittle)이 커서 종이처럼 손으로 찢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압연 공장들은 종종 “유용한 금속보다 고철을 더 많이 생산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Simcoe 2018).
미국 정부는 이 막 태어나려는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다. 정부는 여러 티타늄 스펀지 공장 건설에 자금을 지원했고, 생산된 티타늄 스펀지의 잉여분은 국가 비축용으로 모두 매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티타늄 생산 설비에 대한 신속 감가상각 혜택을 통해 세제 상의 지원을 제공했고, 광산국의 시험 공장에서 생산 기술을 시연했다. 육군은 더 나은 합금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했는데, 그중 6% 알루미늄·4% 바나듐(Ti‑6Al‑4V) 합금은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쓰이는 티타늄 합금으로, 티타늄 산업을 구원했다고 평가받는다.
티타늄을 판재로 안정적으로 압연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1956년 국방부는 티타늄 판재 압연 공정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는 “야금학에서 이제까지 수행된 것 중 가장 포괄적인 기술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Simcoe 2018). 이런 노력 끝에 생산상의 문제들이 점차 해결되었고, 티타늄은 항공우주 분야에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58년까지 프랫 앤드 휘트니(Pratt & Whitney)는 티타늄 부품을 장착한 제트 엔진 5000기를 생산했고, 미국 산업계는 해마다 수천 톤의 티타늄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A‑12, 위키피디아
1950년대 후반, 록히드(Lockheed)는 CIA를 위해 고고도·고속 정찰기를 개발하는 계약을 따냈다. 이는 코드네임 “아크엔젤(Archangel)” 설계의 12번째 반복이었기 때문에 A‑12라는 이름이 붙었다. (순항) 속도 마하 3, 순항 고도 약 9만 피트라는 전례 없는 성능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록히드는 기체 외피가 수백 도까지 가열되는 환경에서도 강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금속이 필요했다. 이 조건은 알루미늄을 배제했고, 남는 선택지는 스테인리스강과 티타늄뿐이었다. 최종적으로 A‑12에는 티타늄 합금이 채택되었는데, 이를 통해 항공기 총중량을 거의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규모로 항공기, 혹은 다른 어떤 구조물을 티타늄으로 만든 사례는 그때까지 없었다. 록히드는 1949년부터 소규모로 티타늄을 다뤄 왔지만, A‑12 이전에 티타늄이 쓰인 곳은 주로 제트 엔진의 일부 작은 부품들이었다. 예를 들어 몇 년 동안 전체 티타늄의 50%가 J‑57 제트 엔진에 쓰였다. 그러나 A‑12에서는 티타늄이 항공기 거의 모든 부품에 사용되었고, **A‑12 구조 중량의 93%**가 티타늄이었다.
티타늄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초기의 록히드는 “티타늄을 어떻게 압출해서 다양한 형상으로 만들고, 용접하고, 리벳을 치고, 구멍을 뚫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Rich 1994). 그리고 하나의 생산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두세 개의 새 문제가 나타나는 듯했다. 티타늄은 염소, 플루오르, 카드뮴 같은 화학물질과 완전히 양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사례에서, 한 엔지니어는 염소계 잉크가 든 펜으로 티타늄 판에 표시를 했다가 잉크가 금속을 산처럼 부식시키며 파먹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가열된 티타늄 볼트는 머리가 떨어져 나가 버리는 문제가 있었는데, 원인은 볼트를 조이는 데 사용된 카드뮴 도금 렌치였다. 여름에 만든 티타늄 용접부가 뜻밖에 파괴되는 일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름철 조류(藻類) 번식을 막기 위해 수도 회사가 물에 첨가한 염소가 원인이었다.
록히드는 기수 전방 동체 일부를 새로운 **베타 티타늄 합금(beta titanium alloy)**으로 제작하려 했지만, 열처리 이후 이 합금은 너무 취성이 커서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는 결국 산세(acid pickling) 공정을 공급업체와 동일하게 바꾸는 방식으로 해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천 개의 티타늄 부품이 고철로 버려졌다. 초기 베타 합금으로 만든 부품 6000개 중 95%가 폐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록히드는 이런 생산 문제들을 점차 극복했다. 예를 들면 가공 분야에서, 처음에는 드릴 비트를 10개 구멍을 뚫을 때마다 교체해야 했는데, 이는 알루미늄을 가공할 때보다 10배나 더 자주 교체하는 수준이었다. 다른 가공 작업에서도, 티타늄의 금속 제거율은 알루미늄 가공 시의 5% 수준에 불과했다. 록히드는 가공성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드릴 비트, 절삭유(cutting fluid), 절삭 기계를 개발하고, 티타늄 가공에 적합한 **이송(feed)과 절삭 속도(speed)**를 찾아냈다(예를 들어, 절삭 속도의 작은 변화가 공구 수명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록히드는 금속 제거율을 “업계 평균의 3~10배”까지 끌어올렸고(Johnson 1970), 드릴 수명은 10배 이상 연장됐다.
A‑12 프로그램은 “사실상 자체적인 산업 기반을 낳았다”(CIA 2012).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수천 명의 기계공, 정비공, 제작자, 기타 인력이 티타늄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훈련을 받았다. 록히드는 티타늄 생산 경험을 쌓으면서 공군과 납품업체들에게 생산 방법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기계공을 위한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공구와 공정을 개발하기 위한 전담 연구 시설을 구축했으며, 숙련된 외부 업체에 연구 계약을 발주해 개선된 장비를 개발하도록 했다”(Johnson 1970).
A‑12는 1962년에 첫 비행을 했다. 그로부터 14년 뒤, 그 후속 기종이자 더 잘 알려진 SR‑71은 약 시속 2200마일의 속도로 비행해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은 속도 기록을 세웠다.
항공우주용 티타늄 제조가 급속히 확대되던 와중에, 티타늄의 매우 다른 용도가 발견되고 있었다. 1952년, 스웨덴의 의학 연구자 페어‑잉바르 브로네마르크(Per‑Ingvar Brånemark)는 회복 중인 뼈에서 혈류를 연구하고 있었다. 한 실험에서 그는 토끼 골수의 치유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토끼 다리에 작은 카메라를 이식해, 상처가 내부에서 어떻게 치유되는지 관찰하려 했다. 나중에 이 카메라를 제거하려 했을 때, 연구팀은 티타늄 카메라 케이싱이 뼈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인체 안에 이식된 어떤 이물질이든 결국에는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여겨졌다. 뼈가 티타늄과 직접 결합한다는 브로네마르크의 발견(그는 이를 “골유착, osseointegration”이라 명명했다)은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고, 의료용 임플란트에 엄청난 잠재력을 시사했다. 브로네마르크는 곧 연구 방향을 골유착으로 전환했고, 결국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연구비를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팔에 작은 티타늄 조각을 이식)에서 티타늄이 인체에 부작용 없이 안전하게 이식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연구 과정에서 뼈가 소리를 전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한 농(聾) 환자는 티타늄이 제대로 이식되었는지 확인하는 데 사용된 초음파 진동을 “듣는” 경험을 했다. 브로네마르크의 한 학생은 이 발견을 토대로 연구를 이어 가, 난청 환자의 청력을 회복시키는 골전도(bone conduction) 이식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브로네마르크 팀은 이후 티타늄 치과 임플란트를 개발했다. 이 임플란트는 종종 항공기급 티타늄 잉여분을 재활용해 제작되었고, 다른 금속 임플란트보다 훨씬 오래 버텼다. 오늘날에도 브로네마르크 시스템의 치과 임플란트는 판매되고 있으며, 티타늄은 치과용 임플란트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재료일 뿐 아니라, 인공 고관절 같은 다른 의료용 임플란트에도 널리 사용된다.
1940~60년대에 열린 산업계 심포지엄 보고서를 보면 티타늄 산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첫 번째 티타늄 심포지엄은 1948년에 열렸고, 해군이 주관했다. 목적은 “티타늄 연구 노력에 대한 포괄적인 검토”였다. 여러 군사 기관이 자체 연구 프로그램을 소개했지만, 발표 대부분은 티타늄과 그 합금의 물리적 성질, 다양한 가공법에 따라 생기는 결정 구조, 티타늄 스펀지를 용해하는 방법 등에 관한 것이었다. 보고서는 실험실 장비 사진, 응력‑변형 곡선 데이터, 상평형도, 티타늄 미세조직의 현미경 사진 등으로 가득하다. 발표의 거의 전부가 연구소나, 광석에서 원료 형태의 티타늄 스펀지를 생산하려는 회사들로부터 나왔다.
1952년에는 또 다른 티타늄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이번에는 육군의 워터타운 병기창(Watertown Arsenal)이 주관했다. 이때쯤 되면 티타늄은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전 심포지엄이 티타늄의 물리·화학적 성질에 대한 실험실 연구에 집중했던 반면, 1952년 심포지엄은 “티타늄의 성질, 가공성, 기계 가공성 등과 유사한 특성에 관한 실용적인 논의”를 목표로 했다. 여전히 물성이 중심 주제였지만, 논의에는 이미 실용적인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티타늄 판재는 얼마나 넓게 만들 수 있는가, 잉곳은 얼마나 크게 제조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단조·프레싱·용접할 수 있는가, 등등이다. 발표자는 티타늄 가공 업체뿐 아니라, 이 금속을 시험해 본 금속 가공 회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1952년 당시 이 회사들 상당수가 이미 몇 년간 티타늄을 다루어 온 상태였음에도, 발표들 곳곳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의 기운이 감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은 이렇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분위기다. 연삭 작업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가공유가 티타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한 회사는, 서로 다른 유체가 왜 서로 다른 효과를 보이는지 이해할 만큼 해당 화학 반응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고 인정했다. 표면처리와 연마 방법을 연구한 회사는 “티타늄 연마에 쓰일 재료와 방법은 아직 확정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다”면서, “가장 흔히 쓰이는 연마재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제조사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분명 개발될 것”이라고 했다. 티타늄 판재의 냉간 성형을 연구한 회사는 자사의 방법을 “조잡하고 미개발 상태”라고 표현했다.
1966년에는 또 다른 티타늄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이번에는 노스럽(Northrop, 당시 Norair 부문)이 주관했다. 이때쯤이면 티타늄은 많은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어 왔고, 이번 심포지엄의 목적은 “다양한 분야의 기술 인력에게 티타늄 기술에 대한 실무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발표 대부분이 티타늄 작업 경험이 풍부한 항공우주 회사들에서 나왔고, 1952년 심포지엄에 깃들어 있던 그 불확실성의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티타늄의 내식성에 대한 발표자는 “대부분의 금속과 달리 티타늄의 부식 저항성은 비교적 단순한 한계 내에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단조에 관한 발표에서는 “티타늄 합금은 상당히 잘 단조가 가능하다…지난 10년간 생산된 수많은 제트 엔진과 미사일 부품,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구조 부품 목록이 이를 입증한다”고 했다. 가공에 관한 발표에서는 “15년 전만 해도 티타늄은 가공이 매우 어렵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연구와 경험은 이 상황을 꾸준히 개선해 왔다”고 말하며, 이는 “공구 재료, 공작 기계, 공구 형상, 절삭유의 점진적인 개선”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1960년대 중반이 되자 티타늄은 성숙한 공학 재료가 되었다. 여전히 연구할 것이 많긴 했지만, 티타늄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과 공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를 사용하는 방식은 잘 이해되었고, 항공우주 및 기타 산업 분야에서의 활용은 계속 늘어갔다. A‑12 이후 군용 항공기에서는 구조 프레임에 티타늄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군용기에서 시작된 티타늄 사용은 상업용 항공기로도 확산되었다. 1971년에는 티타늄 소비량의 46%가 상업용 항공기에, 37%가 정부 주도의 항공우주 프로젝트에 쓰였다.
티타늄의 역사는 우선 정부 연구의 성공 사례다. 티타늄 금속 산업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부는 유망한 생산 공정을 찾기 위해 탐색했고, 크롤 공정을 발견하자 이를 성공적으로 스케일업했다. 또한 티타늄의 재료 특성, 잠재적인 합금 조성, 제조 방법에 대한 초기 연구 대부분을 수행했다. 초기 티타늄 수요의 거의 전부는 정부 항공우주 프로젝트에서 나왔고, 산업이 태동기에 어려움을 겪자 정부는 생산 보조금을 제공하며 개입했다. 그 결과, 티타늄은 알루미늄과 마그네슘이 30년이 걸려 이룬 생산 수준에 10년 만에 도달했다.
초기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된 1951년 직후, 티타늄 가격은 더욱 가파르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티타늄 가격은 인상적인 **23% 학습률(learning rate)**을 보여 왔다. 즉, 누적 생산량이 두 배가 될 때마다 비용이 23%씩 떨어졌는데, 이는 태양광 발전(PV)의 학습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1950년대 후반 정부 보조금이 중단되었을 때 산업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비용 하락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군용 항공우주 분야에서 시작한 티타늄 사용은 상업용 항공기, 의료용 임플란트, 산업 장비, 기타 용도로 확산되었다. 이런 점에서 티타늄은 정부가 새로운 산업을 시동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USGS 데이터 기반
그렇지만 티타늄의 역사는 동시에 이런 산업 시동 정책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높은 학습률에도 불구하고, 티타늄은 여전히 값비싼 틈새 소재로 남아 있다. 2006년 한 보고서에 따르면, 티타늄을 정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알루미늄의 5배, 티타늄을 최종 제품으로 만드는 비용은 알루미늄의 10배에 달한다. 초기 기대와 달리 티타늄은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리스강을 폭넓게 대체하지 못했고, 주로 고유한 특성이 높은 비용을 상쇄할 만큼 중요한 경우에만 사용된다. 항공우주 산업은 여전히 티타늄의 최대 수요처다.
티타늄 생산의 발전을 태양광(PV)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두 경우 모두 기본 현상(금속 티타늄, 태양광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크롤 공정과 실리콘 PV 셀이라는 20세기 중반의 기술 돌파구가 등장하고 나서야 실용적이 되었다. 두 경우 모두 미국 정부가 초기 개발을 대거 지원하고, 첫 번째 고객(정부 위성, 정부 항공우주 프로젝트) 역할을 했다. 두 기술 모두 비슷한 학습 곡선을 보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식 축적과 비용 하락에 따라 초기 시장을 넘어 점차 다른 시장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둘 다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가진 기술”이라는 과장된 기대를 받았고, 처음에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티타늄이 여전히 비교적 비싼 틈새 기술로 남아 있는 반면, 태양광은 점점 널리 보급되고 있으며, 전력 생산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잡을 기세다. 학습 곡선 관점에서 보면, 두 기술은 학습률은 비슷하지만 태양광의 학습 곡선이 훨씬 더 멀리 뻗어 있다. 1975년부터 오늘날까지 누적 티타늄 생산량은 약 5~10배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미국의 티타늄 스펀지 누적 소비량은 1975년 약 25만 톤, 2019년 약 130만 톤). 반면 태양광의 누적 생산량은 30만 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학습률을 가지고 있어도, 태양광은 생산량이 훨씬 더 많이 두 배씩 증가했기 때문에 비용이 훨씬 더 크게 떨어질 수 있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요인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정부 지원의 규모와 지속성이다. 태양광은 1950년대 초기 지원 외에도, 1970년대 미국과 일본 정부의 투자, 1990년대 독일의 발전차액지원제도(feed‑in tariff) 등 추가적인 지원을 받았다. 현재도 세계 여러 나라 정부가 발전차액제도, 세액 공제, 재생에너지 의무 할당제 등을 통해 태양광을 지원한다. 이런 지속적인 보조금은 생산 확대를 유인했고, 그 결과 태양광이 학습 곡선을 따라 빠르게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태양광의 생산 수준은 훨씬 낮았을 것이고, 학습 곡선을 따라 내려가는 속도도 훨씬 느렸을 것이다.
반면 티타늄은 정부 지원이 훨씬 적었다. 1950년대 후반 보조금이 중단된 이후, 티타늄 산업은 대형 군용 또는 상업용 항공우주 프로젝트에 의존해 왔다. 이런 프로젝트가 무산되면(냉전 전략이 폭격기에서 미사일로 전환된 경우나, 초음속 여객기 개발이 취소된 경우처럼) 산업은 곤란을 겪었다. 만약 정부 지원이 계속되었다면, 티타늄 산업은 지금보다 학습 곡선에서 더 앞에 나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둘째는 기술적 요인이다. 태양광 제조에는 잠재적인 공정 개선 여지가 매우 많지만, 티타늄 생산에는 그런 개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 1950년대에는 노동집약적이고 에너지 집약적이며 불활성 분위기에서 배치(batch) 공정으로만 수행할 수 있는 크롤 공정을 대체할 더 나은 스펀지 생산 공정이 곧 등장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공정은 결국 등장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크롤 공정은 티타늄 광석을 정제하는 주요 방법으로 남아 있다.
티타늄 스펀지를 금속으로 만드는 과정 역시 에너지와 자본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공정으로, 충분한 순도를 얻기 위해 여러 차례 용해를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공정 또한 1950년대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정 개선의 부족을 넘어서, 티타늄은 본질적으로 다루기 어렵고 비싼 재료다. 티타늄 잉곳을 봉과 판재로 만드는 일은 티타늄의 높은 반응성 때문에 까다롭다. 티타늄은 쉽게 불순물을 흡수하므로, “표면 결함을 제거하기 위한 잦은 표면 제거와 트리밍이 필요”하고 이는 “비용이 많이 들며 수율 손실도 크다”. 가공 역시 근본적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 한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티타늄을 매력적인 재료로 만드는 그 경도가, 동시에 티타늄을 전통적인 알루미늄보다 가공하기 더 어렵게 만든다. 이는 고강도 강철을 가공하는 것과 비슷한 도전을 제기한다. 그러나 티타늄의 높은 반응성과 낮은 열전도율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티타늄은 반응성이 매우 높아, 특히 고온에서 공구를 매우 빠르게 마모시키는 경향이 있다. 낮은 열전도율은 가공 과정에서 고온이 매우 쉽게 발생함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티타늄은 더 낮은 공구 속도로 가공해야 하며, 이로 인해 생산 속도가 느려진다.
만약 티타늄 생산에서 태양광 제조만큼 많은 공정 개선 여지가 없다면, 즉 더 나은 정제 공정이 없고 화학·물리적 제약이 많은 탓에 개선 폭이 좁다면, 비용이 떨어질 여지 자체가 적다. 비용 하락의 여지가 적으면 티타늄은 계속 비싼 틈새 재료로 남을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생산량 확대를 가로막는다.
티타늄의 역사는 또 하나, 과학적 발견과 기술 진보에서 우연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티타늄의 생체 적합성, 그리고 의료용 임플란트로서의 유용성은 순전히 우연히 발견되었다. 생체 적합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우연한 발견, 즉 골전도(bone conduction) 현상이 드러났다. 이 두 발견은 모두 중요한 의료 기술, 즉 임플란트와 보청(聽) 보조 기기의 개발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티타늄의 역사는 제조(manufacturing)가 기술 발전에서 맡는 결정적인 역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티타늄을 실용적인 기술로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식은 연구실에서 나왔지만, 동시에 **공장 바닥(factory floor)**에서도 나왔다. 티타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화학적 특성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어떻게 단조하고, 용접하고, 프레스 가공하고, 체결 부품으로 만들고, 설계에 반영하고, 가공용 공구를 설계하고, 그 밖의 수많은 현장적 발견을 해 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생산업체는 이렇게 말했다. “고객에게 인장 특성(tensile properties)으로 가득 찬 화물차 한 대분을 보낼 수는 없다. 샤르피 충격 시험(Charpy tests) 결과가 담긴 상자를 보낼 수도 없다. 이 놀라운 특성을 활용하려면,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DTIC 1952). 전(全) 티타늄 기체인 A‑12를 만드는 데 들인 막대한 노력과, 티타늄을 다룰 줄 아는 수천 명의 기계공, 제작자, 엔지니어, 기타 인력을 양성한 이후에야, 우리는 군용 및 상업용 항공기에 티타늄이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실용 지식 – 실제 생산 과정에서 얻어지는 학습 – 은 기술 발전에 핵심적이다. 기술은 재료와 기계, 아이디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모든 것을 실제 할 줄 아는 사람들이 꿰매어 연결한다. 바로 그 사람들이 실제로 일을 하고, 그 일을 점점 더 잘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더 나은 기술이 가능해진다.